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는 표현보다 사랑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겨울은 너무 추워서 게다가 난 추위를 잘 타니까 싫어하고 가을은 쓸쓸해서 싫어했다. 꽃샘추위로 변덕을 부리는 봄도 나에겐 여전히 추워서 싫어했다. 추위를 잘 타는 것처럼 더위도 잘 타고 땀도 많이 흘리지만 그래도 여름은 좋다. 뭐랄까? 여름은 나에게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주는 계절이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한데 우선 내가 한여름에 태어난 여름 아이라서 좋았고, 양말도 신지 않고 슬리퍼만 가볍게 신고서 여기저기 막 돌아다닐 수 있는 가벼움이 좋았다. 재래시장 과일가게 노점에 소담하게 쌓여있는 과일들을 보노라면 입가에 침이 고이고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봄, 가을, 겨울 과일들에선 느껴지지 않는 싱그러움과 생기가 느껴진다. 이것도 아마 내가 여름을 다른 계절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이리라.
가리지 않고 과일을 좋아하는 나에게 어떤 과일이 제일 좋냐는 물음은 참 어려운 질문이다. 말랑하고 과즙이 많은 복숭아, 새콤달콤한 빨간 자두와 잘 익은 천도복숭아, 알알이 주렁주렁 보기만 해도 탐스러운 포도까지 여름 과일은 과일계의 성수기가 아닐 수 없다. 예전에는 수박도 참 좋아했는데 안타깝게도 입맛이 바뀌었는지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중에서 여름! 하면 내 머릿속에서 바로 이미지화되어서 떠올려지는 과일은 보라색 포도다. 어쩜 그리 바다의 푸른색보다 더 시원한 보라색을 띨 수 있을까? 포도의 보라색은 보기만 해도 심장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시원하고 깊고 차분해지는 느낌. 포도알들이 꽉 찬 포도 한 송이를 찬물에 살살 씻어 쟁반에 받쳐두면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어려서부터 포도를 좋아해서 그런지 아이스크림이나 탄산음료, 사탕이나 소프트 캔디로 포도맛을 즐겨 먹을 정도다. 생각해 보니 보라색을 좋아하는 것도 내가 포도를 좋아하는 것에 한몫하는 것 같다. 포도를 좋아해서 보라색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보라색을 좋아해서 포도를 좋아하는 걸까? 나에겐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과 같다.
어렸을 때 작은 마당과 마당 한구석에 작은 꽃밭이 있는 주택에서 살았었다. 그 마당과 꽃밭 덕분에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면 아주 조금은 시골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자랐던 것 같다. 그 꽃밭엔 가시나무(정말 가시나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족들 모두 가시나무라고 불렀던 기억이 있다.)와 꽃사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가 있었다. 여름마다 꽃밭 한구석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라색 포도를 보면 꼭 우리 집이 엄청난 부잣집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우쭐했었다. 동네 친구들과 서로 자랑 배틀을 벌일 때는 소설 동백꽃의 점순이 마냥 [너네 집엔 포도 없지?]를 연신 외쳐댔다.
나는 포도를 먹을 때 물론 새콤달콤한 알맹이도 맛있지만 포도껍질에 잔뜩 머금고 있는 포도 국물 (나는 어렸을 땐 과즙이 아니라 국물이라고 표현했었다!!!)이 더 좋았다. 포도 알맹이를 먼저 먹고 껍질까지 쪽쪽 빨아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강아지를 키웠을 때는 꽃밭이 강아지의 화장실이 되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 해에는 포도가 더 풍년이었다. 포도가 많이 열리면 언니와 채반을 하나씩 들고 가위로 포도송이를 잘라서 잔뜩 수확했다. 씻은 포도를 옆집에도 나눠드리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포도를 먹으며 그날의 만화영화를 보기도 했다.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한 대만 켜놓고 있는데도 더위가 싹 가시는 그 느낌이 생생하다.
요즘은 사실 포도보다 복숭아를 더 자주 먹곤 하지만 그래도 여름 과일을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과일이 포도인 이유는 내가 포도나무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당에 연결된 호스로 포도나무를 비롯한 꽃사과나무, 가시나무에 물을 주고 포도 알이 맺히고 커지고 보라색으로 색깔이 짙어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며 여름을 만끽했던 그 시절. 조금 더 기다리면 시장에 가지 않고도 우리 집 마당에서 맛있는 포도를 잔뜩 따서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그 기대감과 설렘. 그런 장면들이 한 폭의 엽서처럼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해맑고 걱정 없고 티 없이 순수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뭉클한 그리움이 포도에 담겨있다. 어쩌면 나는 한여름에 짙은 보라색을 풍기고 있는 포도를 한 알 한 알 먹으며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