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생일날 첫 출근이 잡혔는데 전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편도 1시간 반이 걸려 출근한 새 회사에는 근로계약서를 앞에 두고, 면접 때 협의한 연봉이 아닌, 터무니없이 깎인 연봉. 업무내용도 면접 때 들은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긴 구직 생활 끝에, 선물 같은 경험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나 홀로 밖에 나가 밥을 먹으면서 우울감에 사로 잡혀있었다.
돌아오는 길도 1시간 반을 지옥철에 낑겨 돌아오면서 기분은 덤덤했다.
머릿속은 온통 한 문장뿐이었는데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나는 나를 다 쓰며 살아야 돼.“ 였다. 그 말은 하루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금요일. 나는 결국 퇴근 시간에 담당자와 얘기를 나누고, 이틀 만에 새 직장을 정리했다.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좀 더 버텨봤어야 하나? 뒤늦게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결정이 난 뒤였다.
주말에 나는 내가 패배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족들이 취업에 너무 기뻐해서 집에는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라도 좋았으면 다녔을지도 모르는데
점심시간엔 나 혼자만 알아서 나가서 먹어야 했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기회조차 없었다.
지옥 같은 주말에 새롭게 다잡고 몇 군데 이력서를 넣고 월요일. 나는 결국 출근하는 척 집을 나섰다.
오빠가 출근을 하면 들어가는 계획이었다.
물론 오빠가 퇴근하기 전에 저녁쯤에도 한번 더 나와야 했다.
새벽의 새들의 울음소리가 그렇게 무서운지 몰랐고, 잘 조성된 동네 숲길은 가을이 덕지덕지 뭍어 있었다.
지붕 있는 벤치에 앉아 형광등처럼 빛바랜 회빛의 천장에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걸 봤다.
태어나서 처음, 떨어지는 낙엽의 소리를 의식한 순간이었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게 망했다고 생각했다.
가장 괴로운 건 짧은 소속감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가족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내 심경이었다. 그 기분은 나를 무엇보다 구제불능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한 달은 버텨보고, 가족에게 말해야지 싶었던 나는 첫날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1시간가량을 산책을 했고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편의점의 여중생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사서 다시 걸었다.
한 달 안에 일을 못 구하면 어떡하지?
나는 언제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지? 더 이상 실망을 주기 싫다.
그리고, 나에게 실망하진 말자.
생각은 멈추지 않고 나를 힐난하고, 북돋고, 널뛰며 반복됐다.
어느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찬송가가 나오는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보조 장치를 끌면서 내 뒤에서 걸어왔다.
깜짝 놀랄 정도로 큰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예수 믿어요! 모든 것은 예수님 믿음 속에 건강도 행복도 있답니다!”
나는 못 들은 척 외면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는 큰 목소리에 쉽게 놀랬다.
모퉁이를 잽싸게 꺾어 돌아오는데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지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