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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다 Oct 07. 2017

신형 방독면이 가져온 달라진 풍경

눈물, 콧물 쏟아내던 화생방 훈련은 이제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올해 여름 즈음이었던 것 같다. MBC <무한도전> -진짜사나이 편을 본 지인 한 명이 방송 이야기를 하며 촌평을 쏟아냈었다. 각개전투 약진에서는 자세를 더 낮춰야 한다느니, 사격에서는 어깨가 들리지 않도록 팔꿈치를 몸통에 바짝 붙여야 한다는 등 흔한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 특히 '무도' 멤버들의 화생방 훈련을 언급하면서는 '그 시절'의 추억까지 소환했다.


우르르 줄을 지어 실습실에 들어가자 조교가 가스탄을 터뜨렸고, 우리는 지시에 따라 정화통을 분리했다. 숨을 참으려고 노력하지만 교관은 훈련병들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군가를 부르라는 명령에 우리 모두는 강제로 숨을 쉬었고, 그렇게 CS탄이라 불리는 가스와의 고통스러운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다시 정화통을 결합하고 간신히 실습실을 빠져나와 방독면을 벗었을 때 얼굴은 눈물, 콧물,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 어려운 걸 해냈다는 뿌듯함보다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이 더 크다
출처: MBC <무한도전> 화면캡쳐


그로부터 얼마 뒤 육군 전방부대 신병교육대대를 다녀왔다. 훈련병들의 일상을 담은 스케치 기사 작성을 위한 방문. 그 날 신교대 한 중대에서는 사격 훈련이, 입소 일자가 빠른 다른 중대에서는 화생방 훈련이 있었다. 사전에 부대와 협의하고 조율하며 절차를 거쳐 진행된 일정이었기에, 훈련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격 훈련과 화생방 훈련을 한 날에 볼 수는 행운을 얻었다.


엄격한 통제 속에 진행된 사격 훈련을 카메라에 담은 뒤 화생방 교장으로 이동했다. 행군과 더불어 가장 힘든 훈련으로 불리는 화생방 훈련을 앞두고 바짝 긴장해 있을 훈련병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화생방 훈련을 마치고 난 후 훈련병들의 고통스러운(?) 모습도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가서 보시면 알겠지만, 생각하는 모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옆에 있던 부대 공보장교의 한 마디는 '화생방 훈련 따위, 우리 부대 훈련병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자신감 정도로 들렸다. 드디어 마주한 화생방 훈련장.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방독면이 (당연히 떠올리던 그것과) 다르다. 낯선 신형 방독면에 당혹스러움이 먼저 찾아왔다. 매끈한 디자인의 신형 방독면은 착용과 분리를 쉽게 만들어 주는 모습이었고, 큼지막한 안면 시계 부분은 더욱 넓은 시야 확보가 가능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두 개의 정화통이었다.


신형 방독면으로 훈련 중인 모습 (출처: HIM)


정화통 자체의 성능이 개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좌우에 하나씩 두 개가 장착되어 가스의 흡입을 철저히 막아준다는 설명이다. 신형 방독면을 착용하고 훈련병들을 따라 가스 실습실 내부로 들어갔다. 교관의 지시에 따라 정화통 하나를 분리했는데, 어라! 가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구형 방독면은 정화통을 결합한 상태에서도 가스가 새어 들어왔는데, 이건 다르다.


정화통 하나를 분리해도 분리한 삽입구로는
가스나 공기가 들어오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고통을 느끼는 훈련병은 하나도 없었다. 화생방 훈련이 끝난 훈련병들은 실습실을 빠져나와 팔 벌려 뛰기를 하며 몸에 뭍은 가스를 털어낼 뿐이었다. 신형 방독면의 놀라운 성능은 화생방 실습실의 출입문을 더 이상 지옥의 문으로 불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신병교육대대에서는 "화생방 실습"이라는 명칭 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명칭은 "방독면 성능 체험".


예전처럼 화생방 가스를 들이마시고 고통을 체험하지 않는다. 이제는 가스를 맡는다면 방독면 착용 불량으로 기합을 받게 될 것이다. 실습실에서 가스를 몸소 경험하고 고통을 토로하는 훈련병을 한 명 볼 수 있었는데, 방독면 조임끈을 느슨하게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놀라운 그 자체.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군에 다녀온 민방위 5년 차 대원으로서 이런 격세지감이 또 있을까. 지옥이라 여겨졌던 화생방 실습훈련은 이렇게 바뀌고 있다.


화생방 실습이 아니다, 방독면 성능체험이다 (출처: HIM)


어쩌면 지금의 이 모습으로 진작 바뀌었어야 했는지 모른다. 굳이 가스를 맛 볼 필요는 없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적 화학무기 공격에 의해 가스를 마시는 순간 전투는 그걸로 끝이다. 화생방 훈련에서 CS탄을 체험한다고 화학 가스에 대한 내성이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 오히려 방독면을 바르게 착용할 줄 알고, 신형 방독면의 성능을 신뢰하며, 두려움 없이 작전에 임할 때 더욱 강한 전투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눈물, 콧물 쏙 빼놓는 화생방 훈련의 모습을 더는 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사실 신형 방독면을 보급한다는 이야기는 몇 해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내구연한 10년이 훌쩍 지난 구형 방독면의 비율이 50% 이상이라는 점 역시 이미 알려진 내용. 하지만 실제 운용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다만 순차적으로 보급되는 탓에 전 군에 신형 방독면이 완전히 보급되려면 시간이 다소 걸릴 것으로 보인다.


신형 방독면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찬사를 늘어놓았다. "군대 많이 좋아졌네" "나 때는 정말 빡시게 했었는데..." 역시나 본인들 힘들었다는 이야기만 할 것이라는 예상 그대로의 반응이 이어졌지만, 신형 방독면의 개발 의의와 새로워진 화생방 교육의 취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는 분위기.


신형 방독면의 보급과 새로운 교육훈련은 적 생화학무기 공격으로부터 방어 능력이 높아지고 있다는 하나의 방증이며, 곧 전투력 강화로 이어지는 요소이다. 가스를 체험할 것이 아니라 가스를 마시지 않도록 대처하는 능력을 갖춘다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의 재정립이기 때문이다.

구형 K-1 방독면(좌)과 신형 K-5 방독면(우측, 개발명 XK-50) (출처: (주)산청)


신병교육 훈련에서 더 나아가 매년 있는 유격훈련에서 더는 화생방 훈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화생방 실습이 아닌 방독면 성능 체험이다. 이미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은 신형 장비를 사용해보지 못한 데에서의 억울함이 있거나, 다른 한편으로 화생방 가스를 겪어봤다는 술자리 안주거리를 가질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뭐, 모든 것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기 마련이니까. 중요한 사실은 변화에 있다. 변화점이 디테일하다면 개선이 되겠지만 원론적이거나 전면적이라면 진화로 불릴 것이다. 물론 신형 방독면처럼 충분히 인정할만한 긍정적인 변화에 한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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