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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조던 May 17. 2018

나는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걸 기록하면 더 좋아지는 마법

나는 좋아합니다. 여름 아이로 태어난 나는 계절 중에 여름을 가장 좋아합니다. 뜨거운 모래사장을 밟는 감촉을,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시원함을 좋아합니다. 수영을 좋아합니다. 수영장이나 바다 아래 잠수를 하고 물에 굴절된 빛의 선을 보는게 좋습니다. 차가운 수박을 좋아합니다. 앙 하고 깨물었을 때 단물이 줄줄 흐르는 하얀 복숭아를 좋아합니다. 큰 창문 앞에서 내리를 비를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함께 쓰는 우산을 좋아합니다. 나의 왼팔과 너의 오른팔이 좀 젖더라도 굳이 한 우산을 쓰는 억지스러움이 좋습니다. 비가 내린 뒤 풀향기와 흙내음이 올라오는 길도 좋습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를 좋아합니다. 평범하지만 늘 듣기 좋은 인사도 좋아합니다. 잘잤어, 걱정했어, 생각났어, 아프지마, 고마워 같은 말입니다. 날씨가 좋은 날 길을 걷다 생각나는 사람에게 전화 거는 걸 좋아합니다. 퇴근길 친구와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는 시간도 좋아합니다. 한 밤중에 침대에서 데굴데굴 깔깔거리며 새벽까지 통화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노을 지는 시간을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합니다. 작가 박완서 선생님이 일몰 시간을 '모든 사물이 화해하는 시간'이라고 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노을을 보며 날 선 마음을 토닥이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아침에 듣는 라디오를 좋아합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지하철보다 버스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버스 창가에 앉아 서울 구경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음악을 들으며 혼자 걷는 길도 좋아합니다. 마중 나가는 것도 좋고, 마중을 나와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시원한 바람이 뺨과 머리카락을 가르는 기분을 좋아합니다. 그네를 타는 것도 좋습니다. 나란히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며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마음에 드는 편지지나 엽서 카드를 사는 것도 좋습니다. 잘 써지는 만년필로 편지를 쓰는 시간이 애틋해서 좋아합니다.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메모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첩도 포스트잇도 좋아합니다.


요리하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단순해지는 시간이 좋습니다. 카레나 스프같은 것을 만들며 수저로 휘휘 젖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빵 굽는 냄새나 커피 향도 좋아합니다. 떡볶이는 정말 좋아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친구들을 초대하는 시간이 좋습니다.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표정을 좋아합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꽃을 한 다발 품에 안고 오는 저녁도 좋아합니다. 물을 주면 축 처진 식물들이 고개를 드는 씩씩함도 좋아합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청소 후 시원하게 샤워하고 나와 말끔하게 정리된 집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창문을 열고 달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도시에서는 어려운 일이지만요. 모르는 낯선 동네 골목을 탐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짐을 푸는 일보다 싸는 일을 좋아합니다. 보고 싶은 영화를 예매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주말에 영화 약속을 잡는 것을 좋아합니다.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고요하게 보는 영화도 좋고, 토요일 심야 EBS에서 하는 영화도 좋아합니다. 영화 대사를 좋아하고, 시나리오 읽는 것도 좋아합니다. 스탠드를 켜고 책 읽는 시간도 좋아하는데,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책 페이지를 접는 순간이 좋습니다.


손을 잡았을 때 따뜻한 느낌을 좋아합니다. 두 팔로 목을 감싸 안으면 느껴지는 단단하고 곧은 어깨의 느낌이 좋습니다. 소식을 궁금해할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도 좋습니다.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도 좋습니다. 만나면 반가울 테니까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기차역을 좋아합니다. 친구들과 돗자리 위에서 마시는 맥주를 좋아합니다. 맥주를 마시다 하늘을 보는 일도 좋습니다. 잠들기 전 마시는 한 잔의 와인도 좋아합니다. 이불속은 따뜻한데 공기는 차가운 느낌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LP판으로 듣는 것이 좋습니다. 음악이 나오기 전 지지직거림을 좋아합니다.


행복하라는 말을 많이 해주시는 외할머니 음성을 좋아합니다. 서로 장난치고 놀리지만 조금만 더 통화하자는 나이 차이 몇 안나는 외삼촌도 좋아합니다. 이모들이 모여 집이 꽉 차고 시끌벅적한 순간이 좋습니다. 이모들은 코미디언보다 더 웃기니까요. 나이만 어리지 오빠 같은 순간들이 더 많은 내 동생을 좋아합니다. 유머를 좋아합니다. 누군가의 웃음을 유발하는 말 한마디가 좋습니다. 함께 본 영화를 한참 동안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언제나 부지런하고 쉼 없는 내 두 손을 좋아합니다.


아직도 다 쓰지 못한 좋아함들이 남아있다는 것도 좋습니다.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록하는 이 시간을 좋아합니다. 인생엔 좋아할 것들이 얼마나 넘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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