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넌 중요하지 않아.
아빠가 딸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오 마이 갓! 여린 소녀의 마음에 얼마나 상처였을까? 특히나 언니는 심한 괴롭힘을 당해 자퇴까지 했고, 작가도 교우 문제로 힘든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혼돈만의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는 말은 비극이다. 허무주의는 자살행위를 이끌었다. 이 우주상에 소녀가 그 어떤 의미도 없다는데,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혼자서 찾아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점 위의 점 위의 점이다. 맞다. 아무리 그의 말이 과학적 사실이라 해도 나는 아빠로서의 그를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러다 진짜 딸이 죽었음 어떻게 해요! 이런 결말도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로 흘려보내시겠어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소중하다"라고 얘기해줘야 해요. 너만 중요하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소중하고 위대하다고요. 어른이 되면 겪고 싶지 않아도 겪어야만 하는 무수한 시련과 고난을 만날 겁니다. 그 암울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래도 털고 일어나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의 힘은 유년기에 불어넣어 주었던 누군가의 굳건한 믿음, 단 한 명일지라도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어른과의 유대에서 나올 거예요.
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닮았다.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다. 질서와 쾌적함이 있는 공간에서. 혼돈으로 흐르는 것이 우주의 법칙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어질러진 방보다는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잘 정돈된 그런 체계 잡힌 곳에서 살고 싶다. 혼자라도 애써 틈만 나면 컵을 씻고, 나뒹구는 양말을 뒤집어 빨래통에 넣고, 곧 또 너저분해질 테이블 위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는 이유다. 조금이라도 한가한 날에는 가구를 옮기고 옷장의 옷을 솎아낸다. 냉장고를 칸칸이 품목별로 정리하고, 분리수거도 꼼꼼히 한다. 바쁜 시간을 쪼개 불굴의 의지로 매일매일 쓸고 닦고 정리한다. 에너지가 달려서 못해낼 뿐이지, 언제나 혼돈을 걷어내고 살고 싶다.
업무, 육아, 집안일, 효도, 데이트, 우정, 배움... 이 많은 걸 해내야 하는 사람으로 나는 단순하고 싶다. 매일 삶의 방향키가 제대로 향하고 있는 지를 점검한다. 너무 할 일이 많을 때는 생각 없이 살게 되더라. 그래서 내 시간을 돌보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조금이라도 내가 더 바라는 대로 살 수 있도록 가지치기를 한다. 인생의 본질(_어떻게 살고 싶은지?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지?_)을 생각하다 보면 명료해진다. 물론 너무 생각이 많아 성찰의 허리케인에 빠져들 때도 있지만, 생각대로 사는 내가 좋다. 혼돈스러울수록 싹 정리하고 싶은 마음, 한 가지에만 몰두하고 싶은 마음. 어쩌면 이런 나의 바람이 데이비드의 그것 아닐까?
들꽃을 사랑하던 소년은 어쩌다 열성 우생학자가 되었을까?
데이비드 너도 그랬던 거지? 이것저것 신경 쓰느니, 한 가지라도 잘 하자 싶었지? 연구에만 매진하는 게 더 편했던 거지? 공간의 어지러움과 잡다구리 한 일상에서 벗어나 삶을 단순하게 일구고 싶었던 거지? 감정도 마찬가지지. 너무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혀 계속 우울하다간 아무것도 못할 거 같아서. 슬프다고 한없이 슬퍼하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한없이 안타까워만 해주는 시간들이 아까웠던 거지? 시간과 감정을 단순화해서 다 끊어내고 물고기에만 그렇게 목매었던 거지? 인생의 실패와 좌절과 고난에 매몰되기 싫어서 앞만 보고 나갔을 거야. 삶에 질서를 부여하면서.
에이, 그래도 아니다 싶을 땐 반성 좀 하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땐 많이 울어도 보지. 연구가 너무 재미있었던 거니?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더라도 한 번쯤 현타가 왔을 텐데. 낯선 감정과 지질한 모습이 싫었던 거니? 근데 말이야. 너처럼 강인한 기개로 끈질기게 노력하여 세계적인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 전부 다 그렇게 자신만이 무조건 옳다는 확신으로 성공한 건 아닐 거야. 너를 닮은 내가 가장 걱정되는 건, 우생학자 살인미수 데이비드 너 때문에, 한 가지에 몰입해서 열심히 정진하는 불굴의 의지가 행여 폄하될까 봐. 그래서는 절대 안 되는데. 절대로 안돼. 어찌되었 건 자신을 긍정하며 한 우물만 파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결과가 좋다 나쁘다를 지금에 와서라도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이 틀렸어도 발전이었던 거지.
훌륭한 그릿(_나는 그것을 끈기와 노력이라 부른다_)으로 훌륭한 업적을 이룬 다른 훌륭한 사람들과 데이비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데이비드가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나고 귀를 열어두었다면? 그들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수많은 어부들, 물고기들에게도 감사를 느꼈다면? 그랬다면 그는 과학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더 따뜻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찾고 싶다. 한 사람을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역사의 뭇매를 맞지 않을 다른 근사하고 기품 있는 이유.
메리 때문이지.
이 책을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우생학의 피해자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애나와 그런 애나가 자식처럼 돌보았던 메리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다. 이 지구에서 그들이 뽑아낼 수 있는 소박한 기쁨들로 서로에게 설렘과 감동을 안겨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 끝까지 버티고 계속 나아가게 하는 이유.
나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은?
"재진이에요. 지수예요. 지원이에요. 그리고 친구들. 피오나 작가님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직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윗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p.228
바로 “우리”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