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책보기] 이규현,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
책을 읽기 전에는 주로 듣던 이야기가 일본 졸부가 반 고흐 그림 비싸게 사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인상파가 좍 나올 줄 알았다. 게다가 책 펴자 마자 1위가 세잔이니 더욱 그렇게 생각할 밖에. 그런데 아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프롤로그를 읽었다. 간단한 통계가 나와 있다. 가장 비싸게 거래된 그림 100위 안에 들어온 작가는 35명뿐이다. 피카소가 15점, 앤디 워홀이 10점, 프랜시스 베이컨이 9점, 반 고흐가 7점, 마크 로스코가 6점 등이다. 의외로 티치아노 베첼리오나 한스 홀바인, 심지어 루벤스 그림도 있다. 미술관이나 교회에 있어야 할 옛날 그림이 왜 팔리는지 좀 의아하다.
나는 세잔의 자 드 부팽 시리즈 중에 하나를 보고 세잔 팬이 되었다. 좋아하는 화가는 많지만 그래도 세잔이 제일 좋다고 말하고 다니는 편이다. 내 카톡 프사는 피사로가 그린 세잔 초상화의 일부분이다. (쿠르베를 그린 그림 속의 그림인데, 거의 이모티콘 수준으로 재미있는 그림이다.) 비싼 그림 100선 중 1위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세잔이 1위 한 것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프랜시스 베이컨이란 '화가'는 첨 들어봤다. 더구나 피사체는 프로이트(의 손자)라니. 베이컨 그림은 좀 특이하긴 한데, 별로 좋아할 느낌은 아니다. 그런데 뭔가 좀 다른 게 느껴지기는 한다. 터너나 엘가를 빼면 별로 내세울 게 없던 영국이 20세기 들어서는 미술, 음악 양쪽으로 아주 위풍당당하다. 비틀즈에 베이컨이라니.
사이토 료에이라는 일본놈이 자기 죽으면 태우겠다고 했던 게 <해바라기>가 아니고 <가셰 의사 초상>이었다. 태울려면 돈을 태울 것이지 재화를 태우겠다니, 아주 고얀 심보다. 수백억원 가치가 연기로 사라지고 돈만 남는 것인데, 이 정도면 한 개인이 인플레를 유발했다고 말해도 될 지경이다. 물론, 가셰 박사 초상은 온전히 잘 남아 있다. 제지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나중에 회사가 재정난으로 어려워지면서 이 그림을 판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음씨를 곱게 써야한다는 교훈이라도 주려는 가셰의 저주 아닐까. (가셰도 인상파 화가 그림들로 꽤 짭짤한 재테크를 했지만, 돈을 벌려는 것이었지 문화재를 훼손하려던 건 아니다.) 고흐 풍의 그림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의 클라이막스 정도에 가셰가 등장하는데, 이 그림 자세로 주인공을 맞는 장면을 보고 뿜었던 기억이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는 캔버스 3-4등분해서 색깔 칠한 그림을 대단히 싫어한다. 무식해서 그런 거니 이해 바란다. 이런 그림을 나는 개인적으로 '몬드리안 류'라고 부르는데, 마크 로스코라는 더 심한 (진화한?) 자가 있다는 걸 이 책 보고 알게 됐다. 난 뒤샹을 비롯한 현대 미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로스코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너무 비난 마시길.
로스코에 비하면 몬드리안은 훨씬 낫다. 이런 류를 제일 처음 시도한 사람이니 특허를 줘도 이쪽에 줘야 한다. 게다가, 이번에 처음 본 <빅토리 부기우기>,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꽤 괜찮다.
몬드리안 류 중에서도 말레비치 정도 되면 상당히 내 취향이다. 사족을 달자면, 칸딘스키는 칸딘스키지 몬드리안 류가 아니다. 파울 클레가 파울 클레인 것처럼.
로스코 류는 정말 보기 싫은데, 한국 포함해서 전 세계에 널려 있다. 그런데 장사가 되는 게 신기하다. 저런 그림을 포토샵으로 그리면 그것도 예술로 쳐줄라나? 나는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이 로스코 류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입체감과 크기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크기는 지금도 대형 프린트로 얼마든지 가능하고, 3D 프린팅으로 이제는 입체감도 가능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잭슨 폴락의 그림이 보기에 그나마 더 좋다.
로스코에 비하면 앤디 워홀도 훨 낫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물론이고, 에드워드 호퍼도. 상대적으로 말이다. 이 사람들이 전부 미국인이라는 사실과 이해할 수 없는 천정부지의 그림값도 관계가 있는 거겠지.
100위 안에 터너 그림은 딱 한 개인데, <현대 로마 - 캄포 바치노>다. 굉장히 구상적인 풍경화다. 좋긴 한데, 이런 그림이 터너 대표격으로 여겨지면 곤란하다. 역시 터너는 폭풍, 난파, 그리고 속도니까. 아래 그림은 유명한 <비, 증기, 속도>고, 그 아래 그림이 100위권에 들어 있는 로마 풍경화다. 나쁘지는 않지만 터너 터치가 매우 상당히 굉장히 약하다. 터너는 대학생 시절 배낭여행 때 런던에서 본 이후 죽 좋아하는 화가다.
터너는 특히 후기에 들어 다작을 하면서 그림을 대강 그린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완성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로스코야말로 같은 말을 듣는다면 뜨끔하지 않을까.
클림트 풍경화도 좋다. 100위 안에 들어 있는 클림프 풍경화 중에서는 <Litzlberg am Attersee>가 좋다. 루체른 생각 난다.
하지만 클림트 본진은 역시 초상화다. 무려 6위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이다. 클림트 초상화는 왠지 고급스런 질감이 느껴지는데, 그게 사실 다 돈자랑이다. 진짜 금박이다. 아버지가 금세공사였다고 한다.
피카소 그림은 반 이상이 큐비즘 이전의 것이다. 청색 시대가 좀 많은 듯. 저자가 하도 칭찬을 해놔서 그런지, <꿈>이 괜찮아 보인다. 피카소 그림이야 전 세계 미술관에서 볼 수 있으니 많이는 봤는데, <게르니카>나 <우는 여인> 정도밖에는 생각이 안 난다. 그런데 마리-테레즈 월터를 그렸다는 <꿈>은 꽤 괜찮다. 기괴함도 별로 없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다. <꿈>은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 이어 2위다.
청색 시대 그림인 <비둘기를 안고 있는 아이>도 좋다.
힐링되는 시간이었다. 역시 그림 여행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