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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과 나무

역사를 어디까지 구부릴 수 있을까?

by 히말


'요아샹 뮈라'라는 인물을 아는가? 기병대를 이끌었던 나폴레옹의 오른팔로, 나폴레옹이 나폴리의 왕으로 임명할 만큼 신임했던 부하였다. 그는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에게 호응하지 않고 자신의 왕좌를 지키는 데 집착했다. 연합군에 대항해 이탈리아인들의 민족주의에 호소했지만, 결국 전투에서 패하고 축출되었다. 그는 화려한 패션 센스로 유명해서 '옷 잘 입는 왕'이라 불리기도 했다.

나는 이 인물을 어떤 만화에서 처음 만났다. 프랑스 대혁명기를 배경으로 하는 만화에서 요아샹 뮈라는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했다. 이 만화는 대혁명에 삶이 얽혀 버린 주인공 몇 명의 삶을 다룬 것이라서, 주인공의 친구라도 실존 인물 뮈라는 등장 장면도 몇 없고 활약도 없다. 그러나 그는 주인공이 활약하는 픽션의 세계를 실제 역사와 연결하는 고리로서, 감초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만화에 감칠맛을 더했다고나 할까. 이것이 팩션의 매력이다.


Murat2.jpg?type=w773 요아샹 뮈라




관상가 양반

팩션은 역사라는 거대한 서사를 끌어들여, 스토리를 풍성하게 하는 아주 편리한 도구다. 더 이상 사실적일 수 없는 시공간 배경을 통째로 가져다 쓸 수 있으니 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역사 기술에 관하여 크게 두 가지 관점이 대립하지만, 역사가 사실에서 유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를 더럽히는 것도 문제겠지만, 역사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영화 <명당>에는 왕을 좌지우지하는 장동 김씨 세력이 등장한다. 이것이 실제 역사의 안동 김씨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안동이 아니라 장동이 된 배경에는 제작사의 현실적인 고려, 즉 귀찮고 소모적인 소송을 피하겠다는 생각이 자리한다. 영화 <명량>이 개봉할 당시, 영화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 배설의 후손들이 영화사에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지 않은가. 역사적 과거는 사람이라는 끈으로 현재와 연결된다. 역사를 어디까지 차용하고 얼마만큼의 픽션을 가미할 것인가, 이것이 팩션이라는 매력적인 장치를 사용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영화 <관상>에는 김내경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계유정난에서 대립한 두 개의 세력 중 하나인 김종서 측의 책사로, 수양대군 측의 한명회에 대응하는 인물이다. 한명회는 두 왕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권력의 열매를 끝까지 즐기다가 간 거물 정치가다. 그런 역사적 거물에 대응하는 인물로 가상의 관상가를 등장시킨 이 영화의 '침범'은 용서될 수 있을까?

가상의 인물인 김내경은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대립이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거의 독식한다. 왕의 밀명을 받아 역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가려내고, 문종 사후에는 김종서의 책사로 활약한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시기에 맞추어 수양대군을 공격한다는 결정적 정보를 공유하는 불과 몇 명의 사람 중 하나가 김내경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책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김내경의 처남, 팽헌의 배신 때문이다. 가상의 인물이 역사적 사건의 결정적 도화선이 되는 것, 과연 용납할 수 있을까?


2013-08-29_17.14.18.jpg?type=w773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이 결정적 승기를 잡게 되는 계기는 가상 인물인 팽헌의 배신이지만, 역사의 진로는 바뀌지 않는다.



만약 김내경의 활약으로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처단하는 것으로 영화가 전개된다면, 그건 분명히 역사 왜곡이다. 그 순간, 영화는 팩션이 아니라 대체 역사물이라는 다른 장르로 변신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 <관상>은 역사의 큰 물줄기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김내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종과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막지 못한다. 픽션 요소가 역사적 사건의 결과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런 정도의 양념은 허용될 수 있는 범위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니, 허용되는 정도가 아니라 훌륭한 양념이다.


팩션, 대체 역사물, 그리고 그냥 역사 왜곡

역사에 만약을 도입하면 대체 역사물이 된다. 필립 K. 딕의 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가정하에 흥미로운 스토리를 진행시킨다.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일본제국이 패망하지 않은 2009년을 다룬다.

반면, 영화 <군함도>는 대체 역사물이라 볼 수 없다.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군함도라는 섬에서,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대항해 폭동을 일으키고 섬을 빠져나오는 결말은 그냥 역사 왜곡일 뿐이다. 나치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그 거대한 결말을 뒤트는 것은 누구라도 알아차린다. 하지만 군함도의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군함도에서 벌어진 사건을 왜곡하면 관람자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이완용이 우국지사로 나오는 픽션이 전개된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대체 역사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경술국적 중 한 명인 조민희가 우국지사로 나오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사람들은 헷갈리지 않을까? 매국노 조민희는 상대적으로 훨씬 덜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사울의 아들>을 통해 존더코만도라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멸 수용소에서 시체 처리를 맡던 유대인 포로들이다. 그런데 만약 이 영화에서 존더코만도들이 의기투합하여 나치들을 물리치고 수용소를 불태우는 전개가 나오면 어떨까? '절멸 수용소에서 시체 처리를 맡던 유대인들인데, 그중에는 반란을 일으켜 나치에 심대한 타격을 준 사람들도 있었다.' 존더코만도라는 단어는 내 기억에 이렇게 각인되지 않을까? 영화 <군함도>가 한 일이 정확하게 이거 아닌가? 군함도는 일본제국이 징용 일꾼들을 이용해 석탄 생산을 하던 곳인데, 인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초토화되었다는 것이다. 초토화되었으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 <군함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려는 일본의 한 섬에 대한 진실을 알리려는 것이 기획 의도였다고 알고 있다. 그것이 그저 군함처럼 생긴 특이한 섬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전쟁범죄의 현장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알릴 가치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된통 당하는 가상의 역사를 그리려는 것이 의도였다면 왜 그 무대가 군함도여야 하는가? 영화 <밀정>처럼, 죽어도 실제 역사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를 암살하는 선에서 끝내면 되는 것이다.


n-1-628x314.jpg?type=w773 영화 <군함도>를 보고 나서 관람자가 기억하는 것은 뭘까? 군함도라는 섬에서 통쾌한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 아닐까?



그렇지만, 영화 <암살>처럼 실제로는 기회주의자로서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살다간 노덕술이 암살당하는 전개 역시 곤란하다. 그걸 보고 통쾌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 쓸모 없는 자위일 뿐이다.

영화가 사회에 대한 책임에 진지했다면, 노덕술이란 친일파 고문 경찰이 해방 후에도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하면서 잘 먹고 잘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쪽이 현명했을 것이다. 노덕술은 해방 후에 약산 김원봉 선생을 강제 구인하고 뺨을 때렸다. 그러고도 이승만 정권에서 권력투쟁을 벌일 정도로 아주 잘 먹고 잘살았다. 우리 사회가 기회주의자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려면, 이름도 변형된 노덕술 캐릭터가 참살당하는 환상보다는 그 반대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영화 <택시 운전사>는 1980년 광주의 참상을 기록해 세상에 알린 외국인 기자의 활약상을 다뤘지만, 그의 보도에 힘입어 광주에서 학살이 발생하는 걸 막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는 않았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보도가 진실을 알리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학살자는 아직도 역사의 심판을 받지 않고 있다.

반면, <화려한 휴가>는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지 않고도 얼마든지 역사 왜곡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은 실제 역사와 동일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시민군은 진압군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보여준다. 무려 공수부대 간부 출신의 퇴역 군인이 시민군의 지휘를 맡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 역사에서 시민군 측은 협상파와 항전파로 나뉘어 격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그런데 시민군이 전직 공수부대 간부가 지휘하는 일사불란한 정예군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건 오히려 학살자 측의 주장에 동조하는 셈이 되지 않을까? 시민군의 저항이 너무 공고하여 어쩔 수 없이 강경하게 진압하였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니까 말이다.

razliv_360531_1621409.jpg?type=w773 영화 <화려한 휴가>는 역사의 큰 물줄기를 건드리지 않고도 역사왜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라는 완성된 서사를 배경으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팩션은 여러모로 편리한 도구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물건이다. 많은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가 그 안에 얽혀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단순히 흥미 유발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면, 하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역사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역대급 흥행을 보였던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주인공 세 사람은 1980년 5월이 다가오자 다들 뭐에 씌었는지 광주로 향한다. 그걸 보면서 어이가 없어 실소하던 생각이 난다. 역사라는 소재를 잘못 가져오면, 역사가 피해를 보기도 하지만 픽션이 피해를 보기도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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