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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과 나무

현학과 궤변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예술가와 감상자의 거리, 그리고 소통의 문제

by 히말


Ezra_Pound.jpg 젊은 시절의 에즈라 파운드



T. 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


4월은 잔인한 달. <황무지>라는 시의 도입부다. 이 시를 지은 토머스 스턴즈 엘리엇은 T. S. 엘리엇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토머스 엘리엇이란 이름은 평범한 범부의 이름 같지만, T. S. 엘리엇은 시인의 이름으로 들리지 않는가. 나는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보다는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를 훨씬 더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현학적인 시지만, 훨씬 더 사람 냄새가 난다고 할까? 그런데 이건 다른 사람들도 그런가 보다. 최근에 어떤 영화를 보다가, 등장인물이 저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장면을 봤다.


<황무지>는 분명히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보다 더 현학적이고 거창하다. 그런데 같은 시대 미국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의 <시편(The Cantos)>에 비하면 <황무지>는 매우 얌전한 시다. 전공 논문 쓰려는 사람들 외에, <시편>을 읽는 사람들이 있을까? 현학이라는 말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이 초장편 연작시는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에즈라 파운드의 시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단 두 줄에 불과한 짧은 시다.


군중(群衆)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 역에서> 전문)


나는 에즈라 파운드의 시 중에서 이 짧은 시를 먼저 접했고, <시편>이라는 현학 덩어리는 나중에 만났다. 순서가 뒤바뀌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엘리엇의 경우도, <황무지>라는 시의 제목은 많이 들었지만 처음으로 끝까지 읽게 된 시는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였다. 향수 냄새에 타락할 것만 같은 자신을 나무라면서, '내가 과연 우주의 심기를 건드려도 될까(Do I dare disturb the universe?)'라고 거듭해서 고민하는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은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이름과는 다르게 너무나 인간적이다.


내가 과연

우주의 심기를 건드려도 될까?

단 1분 안에

그다음 1분이 뒤집어 버릴, 결단과 숙고에 충분한 시간이 있다.

(T. S.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율리시즈>의 난해함과 거리감


제임스 조이스는 소설 <율리시즈>를 완성하면서, 앞으로 50년은 문학비평가들을 먹여살릴 거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율리시즈>를 칭찬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걸 읽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크 트웨인은 '고전이란 다들 읽기는 싫지만 이미 읽었기를 바라는 책'이라고 말했다는데, <율리시즈>야 말로 이 정의에 부합한다는 생각이 든다. <율리시즈>는 원작보다 2차 문헌으로 접하는 것이 보통인데, <율리시즈>를 인용해서 글을 쓰는 그들이 그 책을 정말 끝까지 읽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율리시즈>의 마지막 장은 주인공의 아내 몰리의 독백이고, 그 긴 분량이 단지 여덟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등의 사전 지식은 이 책을 감히 집어들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책은 실제로 읽어보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의외로 재미도 있다.


예컨대 제11장 '사이렌'에는 주인공 레오포드 블룸이 지나가는 전차 소리에 맞추어 방귀를 뀌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실제로 무얼 상징하는가는 별개로, 영웅의 이름을 단 거창한 소설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웃기는 장면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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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의 제목은 '스킬라와 카리브딥스'다. 호메로스의 원작에서 율리시즈는 항해 도중 스킬라라는 괴물과 카리브딥스라는 소용돌이 사이를 절묘한 균형으로 돌파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서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은 격론을 벌이는 스티븐 디덜러스와 벅 멀리건이라는 두 사람 사이를 '교묘하게' 지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입장을 대변하는 두 사람의 논쟁은, 주인공 블룸에게 단지 괴물이나 소용돌이와 같이 피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즈>를 쓰면서 목표 독자층이 일반인이 아니라 비평가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스스로 독자층을 좁히는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애초에 일반 독자층을 밀어냄으로써, 베블런 효과라도 노린 것인가? 읽지도 않을 하드커버 <율리시즈>를 책장 진열용으로 구입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조이스는 흐뭇하게 생각했을까?


자신의 작품이 난해함을 강조하면서 얻어낸 독자들과의 거리감을 통해 조이스는 무엇을 이루려 한 것일까?



궤변과 참신함


미술에 있어 내게 최악의 궤변은 뒤샹의 '샘'이다. 그림이 크기만 하면 관객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은 로쓰코도 만만치 않지만, 그냥 공장에서 떼어 온 변기에 이름만 붙인 '샘'만 하랴. 뒤샹이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정도에서 그쳤다면 나는 뒤샹을 꽤 참신한 현대미술가라 생각했을 것이다. 피카소나 브라크의 그림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입체파적 창의력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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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에 대해서도 나는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니. 대개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Ce(그거) n'est pas une pipe'가 아니라 'Ceci(바로 이거) n'est pas une pipe'라 쓴 것을 칭찬해 줘야 하나? 평범한 파이프 하나 그려 놓고,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차이를 이야기하려고 했다고 말하면 갑자기 예술이 된다? 꿈보다 해몽인데, 해몽이 너무 번잡하거나 설득력이 없으면 그냥 억지다. 뒤샹의 변기가 샘이 아니듯 말이다. 참신함이란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모자 모양의 보아뱀이나, 이오네스코의 희곡에 등장하는 의자들이다.


Rene-Magritte-La-Trahison-des-images-Ceci-nest-pas-une-pipe-1929-Courtesy-of-Centre-Pompidou.jpg 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런데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와 같은 것이 르네 마그리트에게도 있으니, 그것이 '백지 위임장(Carte Blanche)'이다. 언틋 보면 숲 속에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 같지만 뭔가 이상하다. 빈 공간이 말 탄 사람의 모습을 가리고, 나무 위로는 그녀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게 또 일관적으로 그러면 그냥 초현실주의 작품인데, 일관적으로 그렇지도 않다. 일순간 시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가벼운 눈속임에 그친다고 보기에는, 제목이 범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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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외부 정보 수집에 있어 시각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이 그림은 그 사실을 명쾌하게 꼬집은 느낌이다. 우리는 시각에 백지 위임장을 맡겨 놓고 너무 믿고 있는 것 아닌가? 손철주는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에서 '무제'라는 제목을 남발하는 요즘 화가들의 무책임을 꼬집은 적이 있다. 르네 마그리트가 이 그림에 붙힌 제목은 화룡정점이다. 작품을 완성하는 마지막 터치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것부터 보았다면 나는 그를 좀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과연 참신함과 궤변을 구분짓는 선은 미묘하기만 하다.



예술과 소통의 문제


앞서,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가 좋다고 말하는 영화 캐릭터를 언급했다. 마치 이상의 <오감도>가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허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감도>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서 좋은 것이고,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는 알듯 말듯 미묘한 긴장감이 좋은 것이다.


30세에 자살로 생을 마친 여류 시인 실비아 플라쓰의 <에어리얼>을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슬프고 아름다운 환영이 떠오른다. 그래서, '잘 모르겠지만, 느낌이 좋은 시'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설명을 듣기 전에는 무슨 그림인지 알 도리가 없다. 비슷한 주제를 가진 고야의 <5월 3일>은 처음 보아도 무슨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선택은 예술가의 몫이지만, 예술이 감상자와 소통을 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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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도 마찬가지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 <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의자들>의 주제는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와 <의자들>에 비해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는 그 주제를 훨씬 덜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몇 년쯤 전에,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깃털들>을 읽다가 기시감이 들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의 바로 그 느낌. <오감도>, <시편>과 같이 독자들로부터 천 리 밖으로 달아나서 혼자 노는 작가의 가련한 몸짓이다. 같은 노력으로, 분명히 더 나은 소통의 방법을 찾을 능력이 충분히 있는 작가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학이든 궤변이든, 그런 말을 듣는 예술가는 한 번쯤 자문해 봐야 한다. 스스로 세상 사람들과 소통을 끊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구름 위로 올라가 신선이 되는 방법도 있지만, 정말 신선이라면 땅 위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도를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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