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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과 나무

백석에 대한 단상

요즘, 백석을 읽는다

by 히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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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백석의 시를 읽으며 위안을 얻는다. Sylvia Plath와 E. E. Cummings(e. e. cummings라고 써야할 것 같지만) 이후, 이렇게 읽는 시마다 마음에 와닿는 시인은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학교에서 시인 백석을 만나지 못했다. 그가 해방 후 북한에서 살았기 떄문이다. 친일파 놈들의 시는 가르치고, 진짜 훌륭한 시인은 단지 북한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존재를 말살해버리는 군사 정권의 훌륭한 교육 정책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백석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동주>에서였다. 영화에서 백석이 차지하는 포지션은 대단히 독특하다. 윤동주의 사이드킥 역할이지만, 계속해서 좌절을 겪는 주인공에 비해 승승장구하는 묘한 인물이다. 윤동주 정도는 아득하게 초월한 시인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백석은 당시 알아주는 모던보이였다고 한다. 영화 <모던보이>의 박해일 정도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패션 센스가 남다른 미식가임은 물론이고, 수려한 외모로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남자들을 혐오했다는 노천명조차 백석만은 사모했다고 한다. 대표작 <사슴>이 바로 백석을 의미한다고 볼 정황이 많다. 백석의 유일한 시집 제목도 <사슴>이고, 백석의 별명이 사슴이었다는 말도 있다.


이것은 백석의 유명한 사진 중 하나다. 신문 기사인 듯, 글자가 보인다. 읽어보자. 무려 '고흐의 보리밭 같은 머리 스타일'로 영어강의에 열중하는 백석의 모습이라 한다. 아무리 봐도 열중은 아니고 설정샷이지만, 사실 그 점이 대단한 것이다. 1937년에 설정샷이라니! 모던보이가 아니라 포스트모던보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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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체 미남이라 그런지 나이를 먹고 고생을 한 노년기의 사진에서도 백석은 인물이 훤하다. 1980년대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므로, 이미 양강도 삼수군에서 양치기, 돼지치기 생활을 한 지 20년이 넘은 시점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삼수군은 '삼수갑산'의 그 삼수인데, 개마고원 한 복판에 위치한 정말 사람 살 데가 못되는 곳이다.


백석의 시에 대해 논할 자격은 없지만, 나는 백석의 시에 가식이 없어 좋다.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보면, 이건 그냥 산문을 적절히 줄바꿔 놓은 것이다. 이 점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 Sylvia Plath와 아주 똑같다. (구두점을 안 쓰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또다른 시인, E. E. Cummings와 같다. 공통점이 많구나!)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이런 싯구를 멋들어지게 해석하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그냥 그대로 이해하고 싶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니까 눈이 내리는 것이다. 가난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왜 인과 관계가 나오는지, 푹푹이라는 부사는 왜 앞에 있는지를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만주에서는 토굴 같은 방에서 살기도 했지만, 백석은 비교적 유복하게 살았다. 그런 그가 프로파간다 문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말로 산골에 보내졌다. 그후 살아남기 위해 쓴 체제 찬양적 작품을 보면, 백석은 더러운 세상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난 그것이 가족 때문이라 생각한다. <여우난 곬족>을 비롯, 백석의 무수한 시에서 드러나듯이, 가족이란 백석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였으므로.


백석의 가족은 백석의 원고를 화장실 휴지로 썼다고 한다. 어쩌면 백석의 시가 같이 사라졌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쉽기만 하다. 불세출의 천재 시인이 고작 이념 싸움에 묻혀 재능을 발하지 못한 것이 정말 안타깝다.


시인 안도현은 시를 못 쓰게 된 백석이 오히려 행복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노년의 시인은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노년을 맞은 시인의 얼굴이 왠지 편해 보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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