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상가에는 대홍마트라는 적당한 크기의 마트가 있다. 대홍마트는 입주 때부터 입점한 6년차 마트이다. 사실 세련된 프랜차이즈나 대기업 마트가 들어서기를 입주민들 모두 바라고 있었지만 약간은 촌스러운 이름의 마트가 들어서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지금은 떼었지만 초반에는 형형색색 만국기까지 걸어두었었다. 젊은 엄마들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총천연색 국기들에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입주자 회의에서 미관상의 이유로 마트에 건의를 했고 만국기는 바로 사라졌다. 과일이 싱싱하고 나름대로 주민들의 니즈를 파악해서 이것저것 세일도 많이 하는 마트는 그대로 자리를 잘 잡았다. 알고 보니 사장님은 서울에 대홍마트를 4개나 운영하는 베테랑 마트부자였다. 일단 가깝기 때문에 급할 때, 갑자기 간장이 떨어졌을 때, 갑자기 소면이 필요할 때, 주로 이용한다. 하지만 나는 대홍마트를 스쳐지나간다. 저. 저. 저. 오늘도 사장님이랑 상준엄마가 수다를 떨고 있다. 슬쩍 봐도 대홍마트 안에는 아파트에서 스치는 아는 얼굴들이 보인다. 사장님도 동네 소식통이다. 내가 대홍마트에서 알코올을 사는 일은 단호하게도 없다.
대신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해피마트로 향한다. 대홍마트보다 좀 더 규모가 큰 해피마트는 3만원 이상 배달이 되고, 신선코너가 괜찮다. 무엇보다도 사생활 보호가 된다. 나는 카트를 끌고 깐 메추리알, 곤약, 오이, 시원이가 먹고 싶다고 한 바나나 한손, 야쿠르트 한 팩, 용호가 좋아하는 맛동산 같은 것들을 담는다. 신선코너에서 오징어를 팔고 있다. 아저씨의 잘 드는 칼이 오징어를 스쳐지나간다. 문득 오늘의 안주 영감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나는 싱싱한 오징어 세 마리를 채 썰어서 건네받는다.
그리고.
반짝 반짝 빛나는 술코너에 멈춰 선다.
조명에 아름답게 빛나는 병들. 시원한 이슬이 맺힌 캔들. 나의 눈도 빛난다. 소주, 맥주, 막걸리, 와인을 차례로 훑어본다. 반짝반짝. 블링블링. 소주는 시원한 하늘색 병, 입맛 돋구는 초록병. 뭐든 좋다. 맥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청량한 라거 스타일을 좋아한다. 에일 맥주는 무겁고 향이 너무 진해서 입가심으론 영 아니다. 병맥이 아무래도 더 맛있지만 편의를 위해 캔맥으로 간다. 뭐, 캔맥이나 병맥이나 다 맛있으니까. 요즘은 막걸리 종류가 진짜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와인은 특별한 날에만 먹었는데 요즘은 데일리로 시도 때도 없다. 소주는 아직 팬트리에 많이 남아있으니 맥주 두 팩,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하나씩 카트에 담는다. 막걸리는 생각보다 유통기한이 길지 않기 때문에 쟁여놓기 보다는 먹을 당일 날 사는 게 좋다.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여섯 번째,
술은 일주일치 정도 계획해서 너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산다.
“0780이요.”
나는 야무지게 포인트 적립을 하고 마트를 나선다. 장바구니는 속이 비치지 않는 검은 색 계열로 두 개 들고 다닌다. 내 장바구니에 맥주와 와인이 가득한 것을 광고할 필요는 없다. 장바구니가 두 개 인 것은 두 개로 균형을 맞춰 들어야하기 때문. 액체와 유리병은 생각보다 굉장히 무겁다. 하지만 거뜬하게 든다. 다 내가 먹을 술이거든. 3만원 이상이지만 배달을 안 하는 이유는 시원하게 만들 시간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 1분이라도 빨리 가져가서 냉장고에 넣어야한다. 몹시 목이 마르다. 하지만 물이나 커피로 채우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물병원에 상주하는 갈색 푸들과 인사한다. 꼬불꼬불한 털과 항상 웃상인 표정이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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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면 마음이 바쁘다. 장 본 것을 일단 정리한다.
나는 김치냉장고 문을 연다. 결혼할 때 산 김냉은 아주 성능이 좋다. 우리나라가 냉장고를 참 잘 만든다. 명품 백 하나에 몇 백 만원 몇 천 만원 하는 세상에 10년 이상 쓰는 냉장고 삼백만원이면 가성비가 하늘을 찌른다. 우리 집 김치는 시어머니 손맛이다. 김장 때 내려간다고 하면 올해는 안한다고 손사래를 치시고는 혼자 몰래 뚝딱해서 택배로 보내주시는 시어머니다. 물론 나도 그런 줄 알고 빈말로 내려간다고 하는 거다. 기분 좋은 빈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제는 엄마 김치보다 시어머니 김치에 더 익숙하다. 나는 시어머니 김치가 꽉 들어찬 김치 통 뒤에서 김치 통 하나를 꺼낸다. 빈 김치 통이다. 맥주 팩을 뜯어 캔맥을 눕혀 담으면, 8개짜리 팩이 딱 두 팩 들어간다. 따닥. 뚜껑을 닫고 밀어 넣으면 감쪽같다. 개인적으로 맥주의 최고봉은 생맥, 그다음은 김냉맥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김치통에는 와인을 뉘여서 담는다. 와인은 적정 온도는 12도에서 15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영하의 날씨에 꽁꽁 언 손으로 오뎅바에 들어가 김이 폴폴 나는 잔에 손을 녹이며 마시는 사케 외에는 모든 술은 머리가 띵할 정도로 시원한 게 제일 좋다. 혼자 마시는 와인인데 적정한 온도는 내가 정한다.
이제 술도 넣었겠다, 일단 메추리알을 조리기로 한다. 조림은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기 때문에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이 좋다.
깐 메추리알을 깨끗한 물로 한번 헹군다. 편편하고 넓은 냄비에 넉넉하게 물을 붓고 다시팩이나 코인육수를 넣는다. 물이 끓으면 조림간장을 크게 다섯 숟가락 정도 넣는다. 올리고당 한바퀴. 미림 한 스푼. 맛을 본다. 심심하다. 조릴 거니까 너무 짜면 안 된다. 이제 메추리알을 잠기게 넣는다. 곤약은 메추리알 정도 크기로 네모네모하게 썰어서 끓는 물에 따로 한번 데친다. 곤약은 국산이 영 없다. 중국산이니까 어쩐지 한번 데쳐내고 먹고 싶다. 데쳐낸 곤약을 메추리알 냄비에 넣고 내 몸에서 먼 쪽 화구로 옮긴다. 약불로 줄이고 이제 15분 내지 20분, 진한 갈색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짜투리 채소들을 꺼낸다. 양배추, 양파, 당근 같은 것 평범한 녀석들이 있다. 나는 방금 사온 오징어 팩을 노려본다.
“그래! 너로 정했다!!” 나는 만화 주인공처럼 말해본다.
오징어는 물에 살짝 씻어낸다. 냉장고에서 꺼낸 짜투리 채소들을 대충 송송 썬다. 팬은 두 개를 올린다. 쌍 팬이다. 이로서 3구 인덕션에 모두 불이 들어온다. 양쪽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채소를 볶는다. 양파와 당근을 볶다가 양배추는 마지막에 넣어 숨만 죽인다. 한쪽에는 고춧가루, 간장, 고추장 약간, 올리고당, 다진마늘을 섞어서 만들어둔 양념을 투하. 냉동실의 청량고추도 가위로 대강 숭덩숭덩 잘라 넣는다. 매울 거면 확실히 매워야한다. 다른 한 쪽에는 간장, 올리고당만 한 바퀴씩 넣는다. 물기를 뺀 오징어는 마지막에 살짝만 익혀야 부드럽다. 눈치 챘겠지만 간장 쪽은 시원이의 저녁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요리를 할 때 제일 달라진 점은 매운 버전과 안 매운 버전 두 가지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매콤한 오징어 볶음을 안주로 먹고 싶은데 아이 반찬은 안 매워야하니까. 기본 재료는 다 똑같이. 양념만 달리 한다. 팬만 두 개 있으면 크게 어려울 것이 없다. 나는 매운 오징어 볶음을 먹음직스럽게 소복하게 담는다. 이 시간을 위해 아침에 남겨둔 자투리 계란말이도 오징어 볶음 옆에 토핑처럼 얹는다.
설레는 얼굴로 냉동실을 열면, 반쯤 꽁꽁 언 영롱한 빛깔의 하늘색 소주병. 아까도 말했지만 꽁소주가 가장 맛있게 익는 시간은 두시간반이다. 차가워진 병을 꺼내 손목스냅으로 착 흔들면 살얼음이 회오리친다. 완벽한 꽁소주다. 설레는 얼굴로 식탁에 앉아 항공샷을 찍는다. 오늘 하루 가장 행복한 시간. 배달해 먹어도 되지만 그건 반칙이다.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일곱 번째.
키친을 이용해야한다.
일단 소주를 한 잔 따른다. 잔도 미리 차갑게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빈속에 소주가 온 몸으로 짜르르 느껴진다. 입, 혀, 식도, 위. 장까지는 안 느껴진다. 내 몸의 장기가 소주로 씻겨 내려간다. 크으. 이 한잔을 위해 오전 내내 공복을 유지해 온 나를 몹시 칭찬한다.
쫄깃하고 통통한 오징어. 칼칼한 고춧가루 양념. 마지막에 탁 혀를 때리는 청양의 매운맛.
소주가 두잔.
숨이 죽은 양배추와 아삭한 당근. 양파의 단맛.
소주가 세 잔.
자투리 계란말이를 양념에 묻히면 그것도 별미다.
소주가 넉 잔.
아. 안되겠다. 이 양념은 밥을 위해 태어났다. 나는 일어나서 흰 밥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떠온다. 탄수화물은 적이니까. 조금만. 이때는 김가루가 또 필요하다. 냉장고를 열면 뽀로로 김가루가 있다. 슥슥 비벼 한입 먹으면 탄수화물의 단 맛이 풍성하다. 밥알 사이의 매콤한 양념과 오징어.
소주가 다섯 잔.
아. 참기름을 빼먹었다. 참기름을 조금 넣고 다시 슥슥.
소주가 여섯 잔.
키친드렁커. 키친+드렁커. 말 그대로 부엌에서 술을 마시는 주부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저녁에, 밤에, 삼삼오오 모여서 술을 마신다. 하지만 낮에 먹는 술은 주부의 특권이다. 나는 매일 키친에서 드링크하며 새로운 행복을 찾았다. 낮에 집에서 하는 혼술은 안도감이다. 가장 편안한 나의 집에서 가장 편안한 포즈로, 가장 편하게 한잔. 한잔. 음미하며 먹는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이다. 나는 차가운 소주잔을 눈앞에 들어 본다. 막잔이다. 왜 소주는 일곱 잔밖에 안 나오는 걸까. 아쉽다. 하지만.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여덟 번째.
멈출 때를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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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입가심은 필요하다. 식탁을 싹 정리하고 보니 먹느라 메추리알을 잊었다. 마침 갈색으로 아주 간이 잘 배었다. 잘 됐나 한 알 입에 쏙 넣어본다. 짭짤하니 맛있다. 곤약을 조금만 담고 냉장고에 넣으며 아까 잘라둔 오이 두 조각을 꺼낸다.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곤약과 오이 두 조각이면 2차 안주로 충분하다. 김냉에 넣어둔 김치통을 꺼낸다. 차곡차곡 줄지어 담겨있는 맥주를 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전문용어로 시야시 된 맥주 한 캔을 꺼낸다. 찬장을 열면 각종 맥주회사의 로고들이 박힌 사은품 맥주잔이 다양하게 줄을 서 있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잔은 손잡이가 달린 두꺼운 유리로 만든 필스너우르겔 잔. 애니메이션에서 보면 바이킹들이 이 모양의 나무 술잔을 들고 마신다. 355미리 작은 캔이 하나 다 들어간다. 나는 거품이 적당히 생길 수 있게 잔을 기울여 따른다.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아홉 번째.
술은 술 잔에. 아주 급할 때 아니면 캔으로 먹지 않는다.
벌컥벌컥 마시면 반잔이 그대로 사라진다. 차가운 오이를 쌈장에 찍어 아삭아삭 씹는다. 알콜은 수분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수분이 많은 오이는 언제나 훌륭한 안주가 된다. 다시 벌컥벌컥. 작은 캔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큰 캔으로 먹을 걸 그랬나. 아쉽다. 한 캔만 더 먹고 싶다. 하지만.
하지만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열 번째.
진.짜. 멈출 때를 알아야한다.
충분한 포만감과 소주 한 병, 맥주 한 캔의 알딸딸함은 나른하게 만든다. 시계를 보니 2시가 조금 넘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시작한다. 시원이 어릴 때는 샤워도 사치였다. 잠투정이 심한 아이가 겨우 낮잠이 들면 그제야 젖 냄새 나는 몸을 씻으러 가는데 머리에 샴푸를 잔뜩 묻히면 어김없이 문밖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대충 샴푸거품까지 몸에 문지르고 린스도 못하고 나오기 일쑤였다. 그 당시 하필이면 용호는 개발 프로젝트가 맞물려서 매일 야근을 했다. 엄마를 부를까도 생각했지만 엄마에게 우는 소리 하기는 싫었다. 가끔 전화가 와서 괜찮냐 안부를 물으면,
“할만 해.”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 울었었다. 이상한 자존심이었다.
격렬하게 이를 닦는다. 손그릇을 만들어 입냄새를 가둬 코에 대본다. 달큰한 소주 냄새는 톡 쏘는 민트향 치약에 가려졌다. 머리를 말리고 선크림과 파운데이션 정도만 바른다. 이 정도면 낮술 볼터치가 생기로 보인다. 아침엔 비록 거지처럼 등원하지만 오후 하원에는 그래도 사람답게 입고 나간다. 인터넷으로 49900원에 산 트레이닝 세트를 입고 에코백에 지갑, 휴지, 바나나, 물 등을 챙긴다. 그리고 소주병 하나, 맥주 캔 하나를 넣고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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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는 재활용을 수시로 할 수 있다. 이게 얼마나 큰 장점인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개인 가정집에서 재활용 쓰레기가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나온다. 특히나 20평대 집에 재활용 쓰레기를 쌓아 놓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나는 재활용장으로 들어서 주변을 슬쩍 본다. 쨍깡, 소주병을 잡병 칸에 넣고, 텅터러텅텅, 맥주캔을 고철 칸에 넣는다.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열한 번째.
흔적은 바로바로 삭제한다.
“안녕 사랑해 텔레파시 삐용삐용 이이잉---”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텔레파시 인사를 나누고 시원이와 어린이집을 나온다. 하원하러 가는 다른 엄마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엄마. 뭐했어?”
“엄마. 바빴지. 일하고. 우리 시원이 좋아하는 간장오징어 했다.”
“와. 맛있겠다. 엄마. 놀이터 놀다 갈래.”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시원이는 놀이터로 뛰어간다. 놀이터에 들어서면 이미 삼삼오오 모여 있다. 놀이터에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한다. 어린이집과 가까운 입구 벤치 쪽에는 어린이집 엄마들 무리, 반대쪽 입구 나무그늘 아래는 영유아 엄마들 무리가 있다. 무리를 짓지 않는 엄마들이나 아빠들은 펜스에 기대어 휴대폰을 하거나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바라본다. 언덕을 올라가면 놀이터가 하나 더 있는데 보통 혼자나 소수로 놀기를 원하는 아이들은 그 쪽 놀이터로 올라간다. 나는 아이의 사회생활을 위해 어린이집 엄마들 쪽으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며 들어간다. 상준이는 오늘 어린이집은 쉬었지만 놀이터에는 나와 있다. 상준엄마를 중심으로 몇몇이 모여 있다.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마지막 열 두 번째.
내가 먹은 술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
대강 날씨 이야기나 저녁 메뉴 이야기, 대홍마트에 과일 상태나, 어린이집 이슈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스몰토크는 어느 날은 불편하고 어느 날은 재미있다. 나는 대부분 듣는 쪽이다. 대화를 주도해 가는 건 보통 상준엄마이다. 나이가 많은 것도, 우리 아파트 유일한 대형평수인 104동에 사는 것도, 상준엄마의 자신감의 근원이지만 무엇보다 서울대를 다니는 큰 아들의 존재가 그녀를 대화의 중심에 서게 한다. 보통 5,6세가 첫째이거나 외동인 어린이집 엄마들 사이에서 그녀는 선망의 대상이다. 늦둥이 상준이는 과외걱정은 없겠다고 다들 이야기한다. 큰 의미는 없는 스몰토크와 웃음이 오가는 사이 시원이가 미끄럼에서 내려온다.
“엄마. 간식.”
내가 바나나를 꺼내준다. 한 손을 통째로 들고 왔다.
“어휴. 그걸 통째로 갖고 왔어?”
“나눠 먹게요.” 나는 웃는다. 하나만 갖고 나오면 눈치가 보인다. 간식은 아예 안 갖고 나가든가 넉넉히 갖고 나가는 게 놀이터의 룰이다. 시원이가 외친다.
“바나나 먹을 사람!”
시원이는 몇몇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껍질은 각자 엄마들 몫이다.
“진수엄마! 진수도 놀다가자!”
상준엄마가 소리친다. 모두의 시선이 놀이터 너머 진수와 진수엄마에게로 향한다. 진수엄마는 오늘도 모자와 마스크를 눌러쓰고 있다. 놀고 싶어 하는 진수의 손을 잡고 놀이터를 향해 살짝 목인사만 하고 바쁘게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간다. 나는 아침이랑 똑같이 멀어져가는 어두운 포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상준엄마도 아마 진수가 놀이터에 올 거라고 생각하고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빈말이다.
“진수엄마는 맨날 뭐가 바쁜가봐.” 상준엄마는 아마도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부른 것 같다.
“그러게요. 마스크는 답답하지도 않나. 코로나도 이제 끝났는데.”
“시어머니랑 낮에 같이 있는데. 밝을 수가 있나 뭐. 오호호.” 약간의 뒷말이 오간다.
“그 시어머니 보통 아니에요. 숙희네 반찬가게 이번에 마켓컬리에 입점했더라고요.”
“정말? 대단하네. 진짜.”
나는 듣고만 있다. 좋은 말이던 나쁜 말이던 남의 말은 안하는 것이 좋다. 때로는 듣기만 하는 것도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최대한 솔선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대화에서 거리를 두기 위해 괜히 시원이 어린이집 가방을 열어본다. 물통이나 수저통이 제대로 들어있나 확인하려는데 못 보던 바람막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