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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Sep 04. 2024

텅터러텅텅

“어?”

“왜요?” 한 엄마가 물는다.

“아. 선생님이 옷 잘못 넣어 주셨나 봐요.” 나는 바람막이를 꺼내 본다.

“그거 진수 거 아니에요? 아침에 입은 거 봤는데.” 그러고 보니 나도 아침에 본 듯하다. 

“아. 그런 거 같네요. 잘못 넣어주셨나 보네.” 

“진수네. 103동 10층일걸.” 상준엄마는 기억력도 좋다. 

“아. 언니 대단해요. 정말.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해요.”

“언니가 기억력이 좋아서 큰 아들이 서울대 갔나봐.”

“오호호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상준엄마는 큰 아들 얘기가 나오면 기분이 좋다. 세 사람이 까르르 웃는다. 

“갔다 와. 우리가 시원이 보고 있을게. 애들끼리 잘 노는데 뭐.” 상준엄마가 말한다.

나는 잠시 바람막이를 보다가 자리를 뜬다. 바람막이를 갖다 주려는 목적보다 대화에서 거리두기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

지하 3층 주차장은 모든 동이 연결되어 있다. 나는 103동 지하에서 공동현관문 호출을 할까 말까 망설인다. 그냥 내일 어린이집 가방에 넣어 돌려보낼까 생각하는 그 때, 배달기사가 나오며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주고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엘베 10층을 누른다. 진수가 내일 등원 때 입어야할 수도 있으니까. 환절기에는 바람막이가 필요하다.


10층에 내려 1호, 2호를 본다. 누가 봐도 1호가 아이가 있는 집이다. 복도에 킥보드와 자전거, 축구공 같은 것들이 대강 놓여있고 택배 박스도 몇 개 있다. 진수네 엄마 아빠는 그다지 정리를 잘 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가 만다.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서둘러야겠다. 나는 들고 있던 진수 옷을 자전거 손잡이에 걸기로 한다. 부드러운 재질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할 수 없이 급히 다시 주워 거는데.. 순간, 현관문이 화악 열린다. 


와. 이 무슨 민망한 상황이란 말인가. 나는 등줄기에 땀이 삐질 난다. 진수엄마의 눈은 파란 바람막이를 돌려주러 온 건지 훔치러 온 건지 분간이 안 되는 어정쩡한 자세의 나에게 꽂힌다. 진수엄마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진다. 


“아. 그. 진수 옷이 시원이 가방에. 선생님이 착각..”

나는 당황해 횡설수설하면서 동공지진 중이다. 갈 곳을 잃은 나의 시선이 진수엄마의 손에 들린 재활용 박스로 간다. 안에는 익숙한 소주병, 맥주캔, 위스키 병 등등이 산처럼 쌓여있다. 순간, 


텅터러텅텅!!

맥주캔 떨어지는 소리가 우리 둘 사이의 정적을 깨고 복도에 울려 퍼진다. 캔과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메아리를 만들고, 잦아들자,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저기.. 그..”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떼었지만 그 순간 진수엄마가 휙 몸을 돌린다. 황급히 도어락 비번을 누른다. 

“띠용띠용.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삐삐삐. 진수엄마가 다시 황급히 도어락을 누른다.

“띠용띠용. 비밀번호가..” 그때, 문이 벌컥 열린다. 

“야! 너 이거 알콜성 치매...” 라고 말하는 남자가 나와 또 눈이 마주친다. 아마도 진수 아빠일 것이다. 당황한 얼굴의 진수아빠를 진수엄마가 필사적으로 밀고 들어간다. 

“띠로롱. 현관문이 닫힙니다.” 이번에는 도어락 닫히는 소리가 메아리를 만들고,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나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진수의 파란 바람막이를 킥보드 손잡이에 건다. 바닥에 떨어진 맥주캔을 줍는다. 나도 가볍게 즐겨 마시는 국산 초록색 맥주캔이다.


--

텅터러텅텅!!

나는 지하가 아닌 1층으로 나와 103동 앞 재활용장에서 맥주캔을 던져 넣는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캔이 들어간다. 


저녁 내내 진수엄마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원이를 씻기는 동안에 진수엄마의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이 계속 생각났다. 낮에 만들어 둔 간장 오징어를 데우는 동안에 비밀번호를 계속 틀리던 손가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용호의 코고는 소리에 잠이 안 와 가만 누워 있으니 알콜성 치매라고 소리치던 진수 아빠의 얼굴도 떠올랐다. 알콜성 치매라니. 진수엄마는 치매가 아니라 당황해서 비밀번호를 틀린 게 분명하다. 따끈한 정종 한잔 데워 먹으면 잠이 잘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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