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자까야 Sep 04. 2024

확신


생각보다 늦어진 시간에 마음이 바쁘다. 반찬들은 일단 봉지 째 냉장고에 넣고 아까 만들어둔 반죽을 꺼낸다. 봉긋하게 잘 부풀었다.


내가 먹을 만큼만 한주먹 떼어내고 다시 위생봉지에 넣어 냉장고에 재운다. 용호와 시원이의 저녁이다. 일단 빠르게 물을 올린다. 멸치다시팩을 넣어서 끓인다. 역시 이것도 넉넉하게 해서 저녁에 시원이와 용호에게 만들어 줄 육수도 남겨 놓는다. 항상 나의 안주의 핵심은 김씨 부녀의 저녁까지 해결하는 것이다. 감자는 필러로 껍질을 벗겨 납작납작 썰어 물에 담근다. 멸치 육수의 구수한 냄새가 집안에 퍼지기 시작한다. 


육수가 우러나길 기다리는 동안 아까 사 온 반찬의 랩을 벗겨 네 칸 접시에 조금씩 담는다. 마늘쫑, 꽈리고추찜, 무생채, 매실무침. 겉절이는 플라스틱 통에 담겨있으니 그대로 뚜껑만 연다. 식세기 이모님을 아직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설거지를 최소한으로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네 칸 접시는 굉장히 효율적이다. 빨간 반찬에 자동으로 침샘이 오픈된다. 한국인이 분명하다.


나는 작은 냄비에 내가 먹을 만큼만 덜고 감자를 퐁당 넣는다. 감자는 익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린다. 포슬포슬해 져야 제 맛이다. 냉동실의 어슷하게 잘라놓은 대파도 넣고 끓인다. 바글바글 끓으면 이제부터는 빠르게 반죽을 손으로 쭉쭉 당겨서 얇게 펴서 넣는다. 이 과정은 빠른 속도로 진행한다. 천천히 하면 먼저 넣은 반죽이 너무 익어버린다. 반죽을 뚝뚝 떼어 넣고 국간장 조금과 소금을 한 꼬집 넣는다. 


그렇다. 오늘의 안주는 감자수제비다. 


작은 냄비 째 그대로 식탁 위 냄비받침에 올리고 반찬도 놓는다. 옻칠 나무 수저가 어울린다.


그 사이 세워서 보관한 막걸리를 꺼낸다. 막걸리 잔은 예전엔 무조건 양은 밥그릇이었는데 좀 더 세련된 느낌으로 유리잔도 어울린다. 나는 고민하다가 그래도 양은 밥그릇을 세팅한다. 오늘의 수제비에는 양은 술잔이 더 어울린다. 오늘도 항공샷을 하나 찍는다. 


뜨끈한 감자수제비가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일단 냄새로 한 번 식욕을 돋운 후 나는 막걸리를 따른다. 막걸리를 세워 보관하면 정확한 경계로 층이 생긴다. 위에는 청주 스타일에 맑은 술이 뜨고 아래는 곡주가 가라앉는다. 차분히 가라앉은 뽀얀 곡주를 보며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도 차분해진다. 


양은 잔에 투명한 막걸리가 채워진다. 첫잔은 흔들지 않고 아주 조심히 따른다. 나는 첫잔은 무조건 맑게 먹는다. 

한잔. 

시원하고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단숨에 쉬지 않고 벌컥벌컥 마신다. 뜨끈한 수제비를 한 술 뜬다. 감자의 녹말과 밀가루의 분이 우러난 국물은 눅진하고 진득하다. 포슬포슬한 감자를 한입 베어 물면 탄수화물의 달짝한 맛이 가득 느껴진다. 그때 시원한 겉절이를 아삭 베어 물자 입안이 개운해진다. 이번엔 수제비 차례다. 쫀득함과 호들호들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수제비는 씹는 맛이 일품이다. 아작아작한 마늘쫑 무침이 정말 잘 어울린다. 

두 번째 잔은 살살 흔든다. 하얀색 곡주가 섞여 올라간다. 그렇다고 너무 흔들면 안 된다. 중간 정도의 농도를 유지하며 살살 흔들어준다. 

두잔.

첫잔보다 구수한 맛이 강조된다. 반투명한 하얀 막걸리와 하얀 수제비는 조화도 아름답다. 숙희네 반찬가게의 무생채는 쌉쌀하고 달콤하다. 간이 딱 맞게 잘 절여진 가늘게 썰린 무가 입 안에서 아작아작 소리를 낸다.

세잔.

마지막은 이제 있는 힘껏 신나게 흔든다. 그럼 아래 가라앉았던 모든 술 찌꺼기들이 올라오는데 이게 천연 유산균이다. 오천억 유산균 일부러 돈 주고 사먹을 필요 있나. 이거 흔들어 먹으면 화장실 직빵이다. 


끄어어억!! 나도 모르게 트림이 터져 나온다. 속이 뻥 뚫리는 진정한 용트림이다. 이것이 키친드렁커의 진정한 장점이다. 각종 냄새가 섞인 쩌렁쩌렁한 사운드의 트림을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다. 막걸리는 다 좋은데 트림이 너무 난다. 


막걸리는 한 병만 마신다. 막걸리에 어울리는 안주는 보통 굉장히 배가 부른 편이다. 전, 두부김치, 제육볶음, 수제비. 게다가 막걸리 자체가 배부른 술이기 때문에 두 병은 무리다. 나는 냄비 째 수제비를 비우고 식탁을 정리한다. 아주 조화로운 한 끼였다. 숙희네 반찬가게는 확실히 컬리에 진출할 자격이 있다. 


2차는 언제나 그렇듯 맥주다. 김냉의 가장 시원한 곳에 깊숙이 묻혀있는 맥주를 꺼낸다. 차가운 김냉맥에 마음이 설렌다. 배부른 관계로 안주는 하루견과 정도로 한다. 탄수화물이 들어갔으니 단백질을 살짝 채워주는 건강을 생각한 한 끼다. 나는 sns를 켜본다. 심심풀이 견과처럼 sns는 가끔 시간을 때울 때 괜찮다. 나는 나만의 비밀 계정으로 키친드렁커의 삶을 기록 하고 있다. 거의 4년째. 이건 일종의 일기 같은 것으로 용호와도 공유하지 않는다. 어릴 때 자물쇠 채워서 혼자만 보던 비밀일기처럼. 오늘의 수제비 항공샷을 기록한다. #비오는 날 #감자수제비 #겉절이 #막걸리. 


내 알고리즘은 보통 요리와 술, 소설, 육아. 이런 것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해야 하는 것. 알고리즘은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알고리즘인가보다. 태연엄마의 새 게시물이 올라와있다. 역시 또 상준엄마가 놀이터에서 태연엄마의 sns를 알려주었다. “저 엄마 인플루언서래. 뭐 올리면 엄청 잘 팔리더라고.” 나도 궁금해서 한번 슬쩍 들어가 보았다. 한번 들어가 봤더니 자꾸 새 글을 알려준다. 그래서 알고리즘인가보다. 변비해소에 좋다는 효모 공구 글이다. 출산 후에도 아름다운 그녀의 몸매를 보면 나라도 구매욕이 뿜뿜하다. 물론 나는 헬스장에서 피티를 받는 그녀를 보기 때문에 효모로 완성된 몸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녀의 인스타는 각종 럭셔리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다. 로고가 보이는 차, 대리석 톤으로 아름답게 인테리어 된 집, 고급 와인잔에 치즈 플래터. 태연이와 함께 하는 바다뷰의 호캉스. 마치 모든 것이 갖춰진 고급 백화점을 구경하는 기분이다. 부럽지가 않어. 장기하 노래를 또 불러본다. 


역시 신호가 온다. 아랫배가 부글거린다. 변비해소에는 효모보다 막걸리가 직빵이라는 사실을 태연엄마에게 알려주고 싶다. 나는 얼른 2차를 종료하고 행복의 나라로 향한다. 


--


하늘이 개이고 있다. 종일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놀이터가 비에 젖어 텅 비어 있다. 


“엄마. 왜 마스크 썼어?”

“어어. 좀 감기기운이 있나 해서.”

나는 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최대의 수혜로 언제 어디서든 마스크가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점을 꼽는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뾰루지가 났을 때, 세수를 안했을 때, 그리고 막걸리 마시고 트림이 잦을 때. 나는 마스크를 쓴다. 자연스럽다. 


그 때, 저 쪽에서 마스크를 쓴 또 한사람이 어린이집으로 다가온다. 검은 마스크, 검은 모자, 검은 옷. 진수엄마다. 진수엄마는 나를 발견하자 갑자기 휴대폰을 보며 걷는다. 나를 피해가려는 기운이 너무 느껴진다. 나는 오지랖이 넓은 편은 아니다. I에 가까운 E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두루두루 사람들과 잘 지낸다. 나는 정말로 오기가 생긴다. 왜? 왜 그렇게까지 피하는데? 나는 살짝 앞을 가로막아 멈춰 선다.


“안녕하세요.”

역시나 진수엄마는 고개만 끄덕 인사하고 피하려한다. 나는 틈 없이 대화를 이어간다.

“겉절이 정말 맛있었어요. 반찬들이 다 맛있어요.”

“아. 네.”

“뭐 엄마.” 시원이 묻는다. 

“응. 진수 할머니네서 반찬 좀 샀..”

끄어어억!! 그 때, 내 입에서 순간 트림이 터져 나온다. 순간적으로 하부 식도 괄약근이 조절 능력을 잃고 이완하며 위장 가스 압력이 폭발, 배출이 된, 나도 어쩔 수 없는 엄청난 트림이었다. 당황해서 마스크 위로 입을 막아보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이미 뱉어진 트림은 어찌할 수가 없다. 하. 그냥 지나쳐갈걸. 피한다는 사람을 내가 왜 굳이 오기로 불러 세워서 이 쪽팔림을 마주한 걸까. 1초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나는 오만 후회를 한다. 이건 족히 보름짜리 이불킥 감이다.

“엄마아.” 시원이의 책망하는 부름에 정적이 깨진다. 

마스크로 가려진 입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 위로 진수엄마의 눈이 살짝 웃고 있다. 아니, 웃고 있다기보다는 웃음을 참고 있다. 쪽팔림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나는 당황하여 어머어머를 난발한다.

“어머어머어머어머. 미안해요. 아 그냥 터져 나왔네. 오호호. 아까 콜라를 좀 마셨더니.”

진수엄마의 눈이 이번에는 확실히 웃고 있다. 그래. 웃기겠지. 눈빛이 경계를 좀 푼다.

“괜찮....”

끄어어억!!!

뭐지?! 또 나인가? 아니다. 이번에는 진수엄마의 하부 식도 괄약근이 조절 능력을 잃고 이완하며 위장 가스 압력이 폭발, 배출된 것이다! 약 2.75초 간은 어안이 벙벙했고, 그 후에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손으로 마스크를 감싼 진수엄마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다가 이내 정색하고 어린이집으로 뛰듯이 걸어간다. 초조함, 쪽팔림, 상황탈출 욕구 같은 것들이 종종걸음에 한껏 묻어난다.  

“지금. 진수엄마..” 나는 말을 하다가 만다. 

“왜?” 시원이가 묻는다.

“아니야. 얼른 가자. 엄마가 수제비 해줄게.”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지하로 들어간다. 


백퍼. 원헌드레드퍼센트. 확신이 생긴다. 

이건. 

막걸리다.  

이전 04화 비오는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