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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Sep 04. 2024

그럼 한잔 하고 가요.


새로 받은 논술 첨삭 알바를 끝내니 딱 열한시반. 그 트림사건 이후로 며칠 동안 진수엄마를 볼 수가 없었다. 시원이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진수도 등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사라도 간 걸까. 설마. 트림했다고? 그 정도의 일로? 앞서 말했듯이 나는 원래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진수엄마가 자꾸 신경 쓰인다. 재활용 박스에 가득한 술병, 나를 보고 질겁하던 눈빛, 도어락 비밀번호를 계속 틀리던 떨리는 손가락, 알콜성치매라고 소리치던 남편의 화난 목소리와 표정. 

텅터러텅텅! 

복도를 울리던 맥주캔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것 같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당연히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이터에서는 진수의 결석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언제나 말의 시작은 상준엄마. 악의는 없지만 항상 말의 중심에 있다. 상준엄마는 한손에는 진수의 손, 한손에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진수엄마가 택시 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울고 있는 거 같아서 인사도 못했어.” 

“어머어머. 정말요?”

다른 한 엄마는 시어머니가 가까이 있어서 힘들 것 같다는 동정 아닌 동정을 한다. 진수엄마와 같은 103 동에 사는 한 엄마는 자주 싸우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리슨리슨아이캔트리슨. 듣자 듣자하니 못 들어주겠다. 나는 우리 아파트가 층간소음에 취약하다는 말로 슬쩍 주제를 돌려본다. 그러자 상준엄마의 스토리가 시작된다. 서울대 큰아들이 고2때 윗집 인테리어 공사에 동의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 스터디카페 회원권을 선물 받고 그 정성에 겨우 동의해줬다는 이야기. 이 정도는 해야 아들을 서울대 보내는구나. 하는 감탄들. 주제만 돌리면 술술술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나는 아무도 기분 나쁘지 않게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어후. 시원아. 손이 이게 뭐야. 얼른 들어가서 씻어야겠다. 저희 먼저 갈게요.” 하고 자리를 피하면 된다.  


어제는 술을 쉬었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나의 간에게 휴식을 주려고 노력 중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폭음하는 것 보다 매일 조금씩 술을 먹는 게 더 나쁘다는 연구결과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은 나의 정신의 행복을 위해 육체의 건강은 조금 포기한다. 아직 나는 30대 후반. 언젠가는 알코올을 줄여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루 쉰 다음 날의 술이 제일 맛있다. 인내의 고통은 크지만 보상은 달콤하다. 오늘은 끝내주는 걸 만들어 먹을 거다. 


어제 금주의 여파로 오전까지 참는 게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출근한 다음 바로 맥주를 캔 째로 단숨에 마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완벽한 키친드렁커니까. 오전 공복과 알찬 오전시간은 나만의 규칙이다. 집안일을 하고 새로 받은 알바를 하고 열한시반이 되자마자 나는 장바구니를 들고 대홍마트로 향한다. 술은 이미 김냉에 충분히 있으니 오늘은 최단거리 대홍마트에서 빠르게 준비하련다. 숙희네 반찬가게를 들러볼까도 생각했지만 괜히 궁금해서 기웃거리는 것처럼 비춰질까 싶어 그냥 대홍마트로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의 메뉴는 반찬가게 스타일이 아니다. 


-해감 바지락, 오늘만 입고.

오늘 아침 대홍마트에서 온 문자이다. 보자마자 나는 마음속으로 “너로 정했다!”를 외쳤다. 나는 바지락을 2킬로그램만 사고 냉동실에 슬라이스 된 관자도 산다. 언제나 그렇듯 대홍의 술코너는 살포시 지나친다. 오전시간에 술을 담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누구의 입에 오르내릴지 모른다. 특히 상준엄마 눈에라도 띄면 놀이터의 스몰토크 주제가 되기 쉽다. 완벽한 키친드렁커가 되기 위한 열두 번째. 내가 먹은 술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


지하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쁘다. 아무리 해감이 되었다고 해도 바지락은 한 번 더 씻어야지 마음이 편하다. 시간이 촉박하다. 그런데 저 쪽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쓴 누군가가 보인다. 나는 대번에 그 실루엣을 알아본다. 진수엄마다. 나는 잠시 갈등하지만 오늘은 아는 척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아는 척 하기 싫은데 자꾸 말시키면 부담스러울 것이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싶은데 누가 모자를 벗긴다고 생각해보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싶은데 누가 마스크를 벗긴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부담스럽겠는가. 나는 모른 척 우리 동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진수엄마가 내 쪽으로 오고 있다. 나는 못 본 척 내 갈 길만 간다. 


“시원엄마.”

이렇게 또렷하게 부르는 목소리는 처음 듣는 듯하다. 나는 진수엄마가 거기 있었는지 몰랐던 사람처럼 대답한다.

“어머. 안녕하세요.”

이런. 내 연기가 어색하다. 빨리 말을 덧붙여 어색함을 지워본다.

“진수 오늘 등원했어요? 며칠 동안 안 왔다고 시원이가 서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진수엄마가 말을 자른다.

에? 나는 살짝 긴장된다. 말이 없는 여자가 갑자기 단도직입적으로 뭘 말한다는 건가.

“나 술 마시는 거 퍼뜨리지 마세요.” 진수엄마는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한다. 

“에에?” 

나도 모르게 일본 드라마에서 과장되게 놀라는 사람처럼 소리 낸다. 나를 상준엄마처럼 여기저기 말을 전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매도한다. 

“알고 있잖아요. 나 술 마시는 거.”

“진수엄마. 좀 기분 나쁜데. 나 그렇게 말 전하고 다니는 사람 아니에요.”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정신을 차린다. 

“네. 그럼 됐어요.”

날이 잔뜩 서 있다. 트림사건으로 약간 친근감까지 느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내 바지락 봉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빨리 집에 들어가야겠다. 

“제가 지금 가봐야 돼서 그러는데 아무튼 그런 일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네.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나는 우리 동으로 향하려다가 발걸음을 멈춘다. 진수엄마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이번에는 진수엄마가 긴장한다.

“술 좀 마시는 게 어때서 그래요.” 나는 따지듯이 묻는다. 나도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에게 따지고 싶어진다. 

“아니. 그. 저.” 진수엄마는 무슨 대꾸를 할지 머릿속으로 구상 중이다. 나는 빠르게 말을 이어가며 대꾸를 못하게 막는다.

“뭐 죄졌어요?”

“아뇨. 그냥. 저는..”

나의 반격에 적잖이 당황한 진수엄마다.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없다. 아마도 나를 만나면 말하려고 오래 연습한 가짜 기세일 것이다. 그 때, 뽁뽁 소리와 함께 저 쪽 차에 불이 들어온다. 이 아파트에도 외제차가 꽤나 많지만 저 눈에 띄는 고급차는 태연엄마의 차이다. 남의 집 차에 관심을 안 갖으려고 해도 저 차는 한번 보면 잊을 수가 없다. 선글라스를 쓴 태연엄마가 이쪽을 보는 건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뒤에 상준엄마가 지나가는 것을 캐치한다. 나는 상준엄마의 신경이 이쪽으로 곤두서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잠깐 들어와요.” 

“아뇨. 저는.” 진수엄마는 망설인다. 나는 치트키를 던진다.


“그럼. 한잔 하고 가요.”


마스크 위로 진수엄마의 눈이 동그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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