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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Sep 04. 2024

최초의 키친드렁커

아직 임신 티가 나지 않는 나는 버스를 타고 파주 출판단지로 향하고 있었다. 자유로를 달리는 버스에서 울렁임이 시작됐다. 항상 준비성 있게 검은 비닐봉지를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그날따라 아무리 뒤져도 없었다. 나는 기사님에게 소리쳤다. 

“제발 세워주세요.”


자유로에서 버스가 멈추고, 나는 구르듯이 내렸다. 입덧이라는 건 과연 뭘까.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마다 개인차도 엄청나게 심하다. 아예 없는 사람도 있고 일생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사람도 있다. 나는 불행히도 후자 쪽이었다. 입덧은 외부물질에서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라는 설과 태아라는 외부물질의 침입에 모체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무엇을 보호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신체는 처참했다. 우웨에에엑. 이런 상황이 두려워 아침을 안 먹었기 때문에 노란위액을 게워냈다. 


대충 입을 닦고 뒤를 돌아보니 모든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피곤에 찌든 출근인들의 짜증 가득한 표정, 지각을 걱정하는 사람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다시 버스로 올라탔다. 

“아가씨, 괜찮아요?” 

기사님의 물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꾹 참고 다시 의자를 잡고 섰다. 내 앞에 앉은 이어폰을 낀 젊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술을 얼마나 먹은 거야. 참내.”


팅!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입덧이라고 멱살이라도 잡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버스 안은 안 그래도 피곤한 출근시간에 나 때문에 더욱 피곤해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서 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뒷자리 아저씨가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앉아 파주까지 눈을 감고 버스의 덜컹거림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울었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마침 용호에게 전화가 왔다. 용호는 반차를 내고 나에게 달려왔다. 우리는 파주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고, 나는 두 달을 더 버티다가 배가 눈에 띄게 나올 무렵,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 무렵에는 입덧은 끝나고 먹덧이 시작되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먹어댔다. 특히나 느끼한 음식에 완전히 꽂혀 있었는데 파스타는 까르보나라, 고기는 곱창, 채소를 먹을 때도 마요네즈를 범벅으로 해서 먹었다. 용호는 나를 위해 까르보나라 떡볶이와 치즈돈까스, 맥앤치즈를 차려놓고 퇴사 축하파티를 해주었다. 임신 초기에 입덧으로 빠졌던 몸무게는 중기부터는 먹덧으로 15키로가 찌고 얼굴에는 뾰루지들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24주 임신당뇨 검사에서 재검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당 조절을 할 수 있는 식품 목록들을 건네주었고 나는 먹는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했다. 탄수화물을 줄이고 채소와 생선 위주의 식사를 하고 일주일 뒤에 피를 네 번 뽑아서 턱걸이로 재검을 통과 했다. 하지만 의사는 안심할 수 없는 수치라며 항상 식이조절에 신경을 쓰라고 했다. 


하루에도 기분이 열 두 번 씩 널뛰었다. 어느 날은 회사를 그만 둔 것이 너무 후회되고 어느 날은 너무 잘 한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용호가 내 남편인 게 너무 행운 같았고 어느 날은 부모님의 원수처럼 꼴도 보기 싫을 때도 있었다. 저 멀리 단양의 전원주택으로 이사 간 엄마가 원망스러웠다가도 또 어느 날은 엄마한테 전화해서 어리광을 피웠다. 그렇게 임신이 끝나고 있었다. 


출산은 솔직히 기억이 거의 없다. 너무 큰 고통은 뇌가 지운다고 하던가. 부분부분 기억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기억이 희미하다. 아련하게 기억나는 것은 병원 천정의 작은 얼룩과 진통이 올 때 마다 기절을 반복한 것 정도이다. 간호사가 힘을 주라고 했지만 자꾸 기절하는 바람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13시간 진통 끝에 동이 틀 무렵, 나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20**년 2월 18일. 나는 엄마가 되었다. 


그래도 회복은 빨랐다. 어느 출산 카페에서 ‘자분은 선불, 제왕은 후불’이라고 했던가. 자연분만으로 출산 당시에 고통 받느냐 제왕절개 수술로 회복할 때 고통 받느냐의 차이라고 했다. 13시간의 고통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른 회복을 선사했다. 이틀 후 퇴원을 하고 나는 아기와 함께 산후조리원으로 갔다. 사실 조리원은 돈이 너어어무나도 아까웠다. 대출금이 가득한 우리 집을 두고 또 돈을 내고 코딱지만 한 방에 누워있는 게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출산 카페에서는 조리원을 안간 사람들의 100명중 99명이 후회한다는데 어찌하겠는가. 하룻밤에 천 만원씩 하는 비싼 곳도 있다지만 저 세상 얘기고, 뭐가 됐든 남이 해주는 밥이라도 꼭 먹어야한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주일은 너무 아까워서 일주일만 있기로 했다. 


아기는 예뻤다. 아이에게 어울릴만한 이름을 지어야 했다. 나는 말의 힘을 믿는다. 사람이 계속 같은 말을 들으면 그것은 우리의 세포 구석구석에 각인되어 그대로 실현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무엇일까. 자신의 이름이다. 평생. 나와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내 이름을 듣는다. 가수는 노래제목대로 간다는 말이 있지 않나. 나는 이름대로 인생이 흘러간다고 믿는다.


이정은. 정은이라는 여자아이 이름은 한 반에 두 명은 꼭 있었다. 오죽하면 소설 제목에까지 쓰였겠는가. 처음 반 배정을 받고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실 때면 항상 긴장했다. 이 반에 나 말고 또 다른 정은이 있을까. 외모에 대해 쉽게 말하던 80년대 생들은 작은 정은, 큰 정은, 혹은 뚱 정은, 마른 정은. 이런 식으로 불렸다. 직관적이고 순수하게 잔인하다. 키가 작았던 나는 대부분 ‘작은 정은’으로 불렸다. 평범한 이름만큼이나 평범하게 살아왔다. ‘평범’이 최고의 선물이라는 걸 나이 들어서 조금씩 느껴가지만, 특별해지고 싶었던 어린 시절에는 이름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나의 어린 시절 때문에 너무 흔한 이름은 후보에서 제외시켰다. 그렇다고 너무 독특한 이름은 또 놀림의 대상이 된다. 물론 살다보면 예기치 않게, 정말 뜬금없는 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부각될 때가 있다. 유영철이라는 이름이 대표적인데, 철수 수준의 아주 평범한 영철이라는 이름이 잔인한 살인범의 고유명사처럼 쓰일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 사건이 있었던 해, 유영철이란 이름의 개명신청이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최대한 내 이름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좋은 걸로 유명하길 바랄 뿐이다. 


원자는 항렬 돌림이다. 전형적인 경상도 시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지만 딸이라고 했을 때 조금 실망하는 눈치였다. 여자아이는 돌림자를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니 너희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정하라고 했다. 배려인지 무시인지 모를 저 말에 나는 어쩐지 오기가 생겨서 돌림을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원’ 이라는 말은 예쁘게 들렸다. 돌림자가 ‘석’이나 ‘춘’ 같은 거였으면 아마도 포기했겠지. ‘원’ 둥글둥글한 느낌, 니은 받침으로 끝나는 단호함도 마음에 들었다. 중간글자는 인터넷작명소에서 이만원 유료결제를 하고 세 개를 받았다. 여원, 지원, 그리고 시원. 나와 용호는 중성적인 느낌과 평범하지만 기억하기 쉽고, 무엇보다 베푼다는 뜻이 마음에 들어 ‘施’원으로 정했다. 시원. 시원. 매일 불리는 이름이 여름바람처럼 시원하길. 


나는 시원이를 데리고 일주일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용호는 매일 조리원에 와서 아기를 구경하고 나를 다독여주고 갔다. 밤이 되면 매일 집에 가서 택배 정리를 했다. 젖병을 소독하고, 모빌을 조립하고, 기저귀를 정리했다. 집으로 돌아갔을 땐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때도 차가 없었고 지금도 없다. 아마도 우리 아파트에서 차가 없는 집은 우리 집 뿐일 것이다. 나와 용호는 대출금을 반 이상 갚으면 차를 사기로 처음부터 약속했다. 차보다는 집이다. 편안한 이동보다는 엉덩이 밑이 안정적인 것이 나는 더 좋았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엄마가 와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단양에 내려갔다. 혼자된 이모와 외삼촌이 있는 단양. 엄마는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엄마를 보고 울었다. 엄마는 고생했다고 잘했다고 말했다. 칭찬에 인색한 엄마에게서 나온 그 말은 꽤나 진심으로 들렸다. 정부지원 산후도우미가 왔다. 엄마와 도우미는 서로 자신의 육아와 살림 방식이 맞다며 기싸움을 했다. 아기를 그렇게 안으면 어떻게 하냐. 걸레질은 손으로 해야한다, 엄마는 고집스럽게 채근했고, 다 정부 교육 받은 거다, 도우미는 반박했다. 둘은 옥신각신했다. 아기는 울었고 용호는 가시방석에 허둥지둥 댔다. 나는 결국 5일 만에 모두를 돌려보냈다. 엄마는 돈만 받고 요령만 피운다며 도우미를 욕했고, 도우미는 이래서 내가 할머니 있는 집에 안 온다고 욕을 했다. 


모두가 가고나자 평화가 찾아온 듯 했다. 그냥 도와주지 않는 편이 나았다. 나는 수유티를 입고 젖을 먹였다. 어차피 젖은 내가 먹여야하고 잘 때도 내가 없으면 울었다. 용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자기 딴에도 최선을 다했지만 이른바 엄마껌딱지는 잠시도 나를 놔주지 않았다. 100일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통잠은 일어나지 않았다. 101일에 일어나려나 102일에 일어나려나.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기적을 기다리며 창밖을 보았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물론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다. 비록 접종을 위한 외출이었지만 처음 아기띠를 하고 나갔던 순간, 음마에 가까운 엄마를 처음 입에서 터뜨린 순간, 푹 자고 일어나 까치머리로 나를 보고 환하게 웃던 순간, 아기체육관을 잡고 끙차 일어나던 순간. 모든 순간이 눈부시게 예뻤다. 똘망똘망한 까만 눈동자, 꼭 쥔 손에서 나는 꼬순내, 정수리의 시큰한 땀 냄새까지.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나에게서는 계속 질.질.질. 무언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연기처럼 푸쉬쉬도 시원하게 쏴쏴도 아닌 무언가가 질.질.질.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시원이와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어주고 용호에게도 잘 다녀오라 인사했다. 하지만 아기가 낮잠에 들고 정적이 찾아오면 창밖을 멍하니 보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출산 후 호르몬의 영향이겠지. 젖이 분비되면서 호르몬이 폭발하는 거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수유를 하고 시원이는 낮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샤워를 하러 안방 화장실로 향했다. 내가 화장실만 가면 울어대던 시원이 때문에 화장실 문은 항상 활짝 열어 재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날은 내가 문 하나도 맘대로 못 닫나 하는 생각이 울컥 밀려왔다. 젖이 새어나와 딱딱하게 굳은 수유티를 벗고 화장실 문을 닫았다. 불도 켜지 않았다. 화장실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만에 의지해 물을 틀었다. 샤워부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정수리에 떨어지는 뜨거운 물을 그대로 맞았다. 온수비 걱정도 잊은 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샤워기를 껐다. 아. 나 시원이 엄마였지. 밖에 아기가 있지.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인지하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까지 기어와서 울고 있는 시원이를 젖은 몸으로 안아 올렸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바로 있는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가관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은 미역처럼 늘어지고 그 아래로 젖은 팅팅 불어있었다. 출산 전 쪘던 20키로는 아직 5키로가 옆구리에 붙어있었다. 배는 주글주글해서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흐느적거렸다. 젖은 머리를 넘겨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질.질.질. 빠져나가는 것은 가늘고 가는 머리카락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당장 앞에 있는 로션통을 잡아 던져 거울을 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깨진 거울을 누가 치울 것이며, 저만한 크기의 거울은 가격도 몇 십 만원이다. 거울 파편에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것이며, 저것을 깬들 내 기분이 나아질 것도 없다. 나는 이성을 차리고 머리를 말렸다. 샴푸질을 하지 않고 물만 맞아서 뻑뻑한 머리를 대충 말려 묶고 시원이를 아기띠에 묶었다. 집에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6월의 하늘은 높았다. 나는 시원이를 데롱데롱 매달고 걸었다. 유모차 안장에 가시가 달린 것도 아닌데 태우기만 하면 울어대서 당근에 팔아버렸다. 당분간 이동수단은 아기띠로 정했다. 아직은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이라 그래도 걸을 만 했다. 집에서 15분쯤 걸어가면 경의선 숲길이 있다. 예전 경의선 철길을 공원으로 개조한 곳인데 걷기 편하고 평화로워서 나는 일부러 15분을 걸어와 이곳을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길은 쭉 한쪽으로는 연남, 다른 한쪽으로는 원효로까지 직선으로 이어진다.


나는 직선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양쪽으로는 식당들이 즐비하고 있었다. 아직 가정집도 드문드문 있지만 대부분 식당이나 카페로 개조되고 있었다. 여기 집들은 아마도 예전에는 최악의 입지였을 것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잤을 리가 없는 소음과 먼지를 고스란히 안았던 이 집들은 이제는 로또를 맞은 듯 예쁜 식당과 맛집들로 변해가고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땀이 또르르 흘렀다. 아기 띠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나쁠 것이 사실은 없었다. 아기는 건강했고 나도 건강했고 남편은 다정했다. 심지어 당장 생계 때문에 밭을 매러 나가야하는 일도 없었다. 기분이 나쁜 것은 사실 배부른 소리였다. 하지만 나쁜 것을 어찌할까. 나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더 기분이 나빴다. 


나는 어린잎들이 점점 더 진한 초록색으로 변해가는 나무들 사이의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거기에는 양복을 입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아저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식당에 앉아 숲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뭐 별거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생기 없는 시선이 있을 뿐이었다. 나무 데크 테라스에 테이블은 동그란 파란색 옛날식 플라스틱 테이블이었다. 아저씨는 사다리꼴 모양의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와이셔츠를 대충 걷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땅콩, 아주 고전적인 마른안주인 땅콩 그것만이 있었다. 그리고...


소주회사 로고가 새겨진 앞치마를 입은 알바생이 잔을 들고 왔다. 파란색으로 적힌 오비라는 글씨는 거의 사라진 두툼한 투명 유리잔, 묵직한 손잡이, 기포가 솟고 있는 신선한 금빛 액체, 2센티 가량의 하얀 거품이 살짝 넘치는 잔을 파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저씨는 내려놓기가 무섭게 손잡이를 잡고 잔을 입으로 향했다. 꿀꺽꿀꺽꿀꺽. 금빛 액체는 아저씨의 식도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젖혀진 고개로 드러난 울대뼈가 꿀렁거리며 위아래로 액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꿀꺽꿀꺽꿀꺽.

가능한 거리가 아니지만 내 귀에는 울리고 있었다. 

꿀꺽꿀꺽꿀꺽.

아저씨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테라스로 들어가 제일 구석자리에 앉았다. 

생맥주 하나만 주세요.

아저씨는 흘끔 나를 보았다. 아기띠를 차고 할 대사가 아닌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가끔 아이와 외출을 하면 중년, 혹은 노년의 행인들의 관심을 받을 때가 있다. 그 관심은 대게 아기 양말을 안신기고 나왔다, 목이 너무 꺾인 것 아니냐, 아들이냐, 애 하나냐 등등 다양하다. 하지만 아저씨는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대신 땅콩을 하나 까먹고 다시 손목을 꺾어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딱 두 번 스냅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넣고는 굉장히 낡은 서류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테이블에 오천원짜리를 올려두고. 


나는 테라스에 앉아 멀어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알바생은 내 자리에도 생맥주를 갖다 주었다. 어느새 시원이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어색한 팔 동작으로 아이를 피해 맥주잔을 들었다. 손잡이의 냉기가 그대로 내 손을 타고 팔을 통해 가슴까지 전해졌다. 나는 입을 가까이 댔다. 앞에 10키로 아이가 매달려 있으면 팔을 가까이 가져가기보다는 입을 가까이 가져가게 되더라. 나는 입을 쭉 내밀고 거품에 입술을 댔다. 하얀 거품이 그 어떤 부드러운 크림보다도 입에 감겼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젖혀 아저씨처럼 맥주를 밀어 넣었다.

꿀꺽꿀꺽꿀꺽.

내 감춰진 울대뼈도 꿀렁꿀렁 위아래로 액체를 받아들였다. 나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단숨에 500미리의 맥주가 바닥을 드러냈다. 거품이 바닥에 얕게 깔렸다. 

똑. 

결로현상으로 맥주잔에 맺힌 이슬이 시원이 이마 위로 똑 떨어졌다. 그 순간 시원이가 눈을 떴다. 나를 확인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시원이의 이마 위에 떨어진 것은 이슬이 아니었다. 내 눈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나도 시원이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이것이 내가 키친드렁커가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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