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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Feb 19. 2022

깨어진 알의 언어


 몇 년 전 어느 날 뜬금없는 뉴스를 보다가 공황이 온 적이 있다. 염전 노예로 오랫동안 착취를 받던 분이 구출된 지 몇 달 만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한동안은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방송을 보면서 혼자 그렇게 울었다. 소중한 생명체로 존중받지 못한 그들의 존재가 내 심장 쪽으로 세게 날아와 박히는 느낌이었다. 숨을 쉴 수 없어서 마치 그 일부가 나의 영혼과 맞닿아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의 생각과 열정과 사랑과 의무를 착취당하던 환경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그렇게 투쟁하여 세계를 깨뜨리고 밖으로 나왔지만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어떤 날은 의미 없는 자기 위안에 시간을 다 보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역시 나는 필요 없는 사람이야.'라며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날은 그 축축하고 어둡고 답답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내가 그토록 공명하던 존중받지 못하던 생명체들처럼.


 나를 속박한 그곳은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안락이 있었다. 그 안락은 고통의 반복에서 비롯된다. 매일 같은 슬픔과 우울과 자기 연민의 반복은 새로운 고통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늘 지긋지긋하게 나를 눌러오는 무기력과 절망의 가장 큰 장점은 '안주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렇게 익숙해지는 고통은 점차 특별한 안락이 되었다. 모든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현실에 대한 변명도 필요 없었다.


 깨어진 알 밖의 세상은 두려움으로 시작했다. 내가 왜 그렇게 투쟁을 했는지를 이해해야 했고, 왜 밖으로 나왔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단순히 그곳이 괴로워서 나왔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알 속에서도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태어날 세계조차 괴로움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알 속에서 함께 삐져나온 끈적하고 지독한 그 사실은 작은 날갯짓도 시작하지 못하게 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새는 아프락사스에게로 나아간다. 선함과 악함을 모두 가진 신적인 존재에게 말이다. 사실 선과 악을 모두 가진 신적인 존재라는 말 자체도 모순이라고 데미안은 말한다. 세계를 창조할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악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관습적으로 바르고 착하고 행복한 신의 길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타인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착한 사람은 자신의 것을 우선하지 못해 속상하면 안 되는 것이다. 세계는 속상할 일이라면 애초에 부탁을 받지도 말라고 한다. 내가 생기기 훨씬 전, 그러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만들어진 '착한 사람'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악마적인 한쪽을 완벽하게 가려야만 한다.


  따뜻한 양면성.

그것은 내가 날개를 펴기 위해 가장 먼저 마주해야 할 금지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해심의 이면에 자리 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상한 마음'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의 것으로 마주해야 했다. 결국에는 속상하지만 타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도 '착한 사람'으로 새롭게 정의해야 했다. 정말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일이었다. 행복을 정의하고, 타인을 정의하고, 성공을 정의하고, 사랑을 정의해야 했다. 그렇게 아프락사스를 만들어야 했다.


 서서히 끈적한 과거의 이물질이 증발한 깃털들은 가벼워졌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날 수 있는 적당한 날개를 가졌다. 슬프고도 강하고, 괴롭지만 보람찬 세상을 날아가기에 충분한 날개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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