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적 성향에 대하여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서로 알아갈 때, 대부분 보이는 것들로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상대방이 (의도적이든지 의도적이 아니든지) 보여주는 것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서 형성된다. 결론적으로 한 사람의 이미지 형성에 있어서는 주관적인 요소들이 개입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추론의 과정이다. 상대방이 직접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닌, 위의 절차로 형성된 이미지는 결국엔 '이 사람은 이렇게 행동을 하니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는, 판단을 근거로 삼아 다른 판단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와 바움가르텐의 논리학에서 말하는, 개념으로부터 판단을 거쳐 이러한 추론에 도달하는 과정과 같다 (Kant, 1800; Baumgarten, 1761).
그리고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계속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그것에 대한 인식은 더욱 견고해져서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를 넘어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형성된 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때에는 '변했다'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럴 경우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전편에서도 이야기하였듯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매우 자기중심적이다. 나도 보면 신념이라는 큰 틀 안에서 원하는 대로 큰 목표들을 설정하고 살아가지만 그것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들은 그때그때 기분이나 흥미에 따라 행동을 한다. 이러한 것은 충동적이라던가 즉흥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데, 갑자기 몇 년 동안 기르던 머리를 단발로 확 자르고 싶으면 별 고민 없이 가서 자르거나, 별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나를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내 입장에서는 이것이 나의 삶의 목표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거나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니니 하고 싶을 경우 고민 없이 바로 해버린다. 정말 사소하게는 문득 길을 가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럼 상황을 판단하여 나의 미래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을 경우 (개인적인 신념) 실천에 옮긴다. (...) 생각해보면 내가 평소에 하지 않는 일들을 그냥 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누가 보던 보지 않던을 떠나서 오롯이 나의 기분과 판단에 달려있다. 아, 다시 생각해보면 나에게 평소에 하는 행동들이라는 게 있을까 싶다.
물론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내가 보이고자 하는 특정한 이미지가 있는 경우, 나는 그 이미지에 맞게 일관적인 행동들을 보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없을 경우엔 나는 대부분 굉장히 솔직한데, 그런 솔직함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신념) 나의 기분과 흥미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무쌍한 행동들을 꾸밈없이 나타낸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대개 그 사람의 보이는 행동들에 입각하여 그 사람의 이미지가 형성이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행동들에 일관성이 있어 이미지 형성에 있어서 사람들이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데, 나의 행동에는 딱히 일관성이란 게 없으니 사람들은 나를 규정짓기 힘든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일관성이 없는 행동들을 보임에도 이미지가 형성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특이하게도 사람마다 다르다. 실제로 한 번은 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교회 친구 B를 함께 보게 되었는데, 그 날 처음 만난 학교 친구 A와 B가 이야기하던 중, 서로가 알고 있는 내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A와 B를 따로 만나게 되었을 때, A는 B가, B는 A가 나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나는 두 사람이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 모두 나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했다.) 이 친구들의 의하면 내가 그들이 생각하는 그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할 때엔,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가지고와 나를 이해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럴 경우 그것이 이상한 의도가 있거나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굳이 따지고 들려하지 않고, 이것은 그들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나의 마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간혹 내가 본인들이 생각하는 내가 아니었을 때 서운해하며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엔 그들이 규정지은 이미지에 나를 항상 맞춰주는 것은 너무나도 피곤하다. 그렇기에 그것을 감수해야 할 특정한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 가깝게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가 매일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기준으로 대한다. 내가 어떠한 사람을 나의 신경 쓰는 사람 부류 안에 넣어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나에게 여전히 소중한 사람이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하는 기대를 갖지도 않는다. 나도 그 사람의 속성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본다. 그리고 감사한 것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나를 이미지나 특징들로 규정지으려고 하지 않는다. 어제까지는 당근을 극도로 혐오했는데 오늘은 먹어보겠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 오늘은 당근을 먹고 싶나 보군'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아니 그냥 그런 나의 행동의 변화에 이제는 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 사람들은 변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나의 어떤 속성에 집중하기보다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바라봐 준다. 이러한 사람들과 나는 더 편하게 터놓고 지내게 되는 것은 사실이고 그러다 보면 상대적으로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 보면 충동적이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이코패스의 이 기본 성향은 다른 성향들과 마찬가지로 꼭 부정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이코패시 (psychopathy)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 이런 충동이 본인들의 꼭 내적 요인이 아닌 외적 요인들에 의해서도 규제될 가능성이 높지만, 사이코패스는 외적 요인보다는 내적 요인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차이점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사이코패스=범죄자'라는 편견이 타당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들도 사이코패시라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기에 범죄적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유가, 그들이 범죄적 욕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규제 요인들 때문에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욕구를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처럼,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충동적 기질을 비롯한 여러 기질들과 결합될만한 반사회적 욕구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