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ndys May 10. 2020

엄마와 한강을 갔는데 눈물이 났다.



코로나19로 인해 재택근무 한 달 차, 그리고 무급 휴가 두 달 차다. 3년 전 취업을 준비하던 때 이후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최대로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엄마와 보내는 시간도 부쩍 많아졌다. 이 글은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그의 일상에 대해, 그리고 최근 그와 보냈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쓰게 만든 장본인, 엄마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고.




경임, 그는 60번째 생일을 앞둔 중년의 여성이자 나의 엄마이다. 그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는데, 경임이 30대 중반이던 어느 날부터 그는 홀로 두 딸을 키우게 되었다.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던,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던 전 남편과의 이혼 때문이었다.


경임은 30대의 어린 나이에 초등학생 두 딸을 포함한 세 식구의 가장이 되어 무거운 책임감을 어깨에 인 채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다. 때로는 마트 계산원으로, 자동차 부품 공장의 공장 노동자로, 화장품 외판원으로 업종을 바꿔가며 정말이지 '개미처럼' 일했다. 그는 주말 추가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식대를 아끼려고 매일 같이 김치, 멸치가 반찬인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지만 그런 그가 한 달에 버는 돈은 고작 100만 원도 안 되는 적은 돈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월급의 70퍼센트 이상을 저축하며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그에게 꿈이 있다면 세 식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리라.


그는 30대와 40대 내내 "지겨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지겹다는 말이 우리를 향했던 건지, 제대로 된 취미나 여가 생활을 가져볼 여유조차 없던 본인의 삶이 지겹다는 건지 몰랐다. 어렸을 때의 언니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매일 같은 지겹다는 소리에 상처를 받았던 것도 같다. 어른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그는 당시의 자신이 견뎌내야 하는, 책임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많이 버겁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내가 기억하는 경임은 억척스럽고 야무진 아줌마였다. 그때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10원짜리 한 장도 허투루 돈을 쓰는 일이 없었다. 365일 가계부를 꼬박꼬박 쓰며 500원짜리 콩나물 하나도 꼼꼼하게 기록하고 돈을 아꼈다. 시장에선 흥정과 덤에 능수능란했고 할 말은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 번 불 같이 화를 내곤 뒤끝은 없는 사람. 그는 깔깔대고 웃다가도 언니와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특히 어른에게 예의 없이 굴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 혹은 남의 물건에 손대는 것만큼은 안된다며 더욱 엄격하게 혼을 냈다. 행여나 두 딸이 버릇없이 자라 '아빠 없이 자라서 그렇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여 더 호랑이 같이 화를 냈는지도 몰랐다.


그는 20여 년 간 여러 회사를 전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꽤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50대 초반,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경임은 퇴직 후 자연스럽게 전업 주부의 길로 들어섰는데, 그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재혼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바지런한 성격 덕분에 퇴직 후에도 바쁘게 지냈다. 그의 50대는 처음 해보는 취미 생활과 새로운 배움들로 채워졌다. 한식 요리사 자격증, 요양 보호사 자격증, 보험설계사 등 각종 자격증에 도전하는 한편, 탁구나 배드민턴은 물론 산악회에 가입해 등산까지 부지런히 다니며 여가를 즐겼다. 그러는 사이 호랑이 같았던 그의 성격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한편 경임이 은퇴를 할 나이가 되며 나도 어른이 되어갔다. 나이만 먹는 어른인 것 같았지만 왠지 나이가 들수록 경임과의 공통점은 점차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도 사사건건 부딪혔다. 소모적인 언쟁이 거의 매일같이 이어졌다. 그와 최소한의 대화 만이 정답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순간의 갈등을 피하면 그뿐, 관계를 개선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기적인 딸로 커 버렸으니까, 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글쓰기 모임에서 종종 그에 대한 미안함을 떠올리며 글을 썼는데, 글을 쓰는 동안 못난 딸이었던 지난날들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회개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러던 중 난데없이 코로나19가 등장했다. 이 바이러스는 확산세가 매우 빠른 것이 며칠 만에 전국에 확진자를 몇 천명이나 쏟아낼 만큼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회사에서는 바이러스 확산을 선제적으로 예방하는 차원에서 전 직원 대상 재택근무를 하게 했다. 재택근무를 시작하니 24시간 내내 집에만 있게 되자 몸이 근질근질했다. 경임과 보내는 절대적 시간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었다. 평일에는 집에서 근무하고, 주말에는 사람을 피해 마스크를 끼고 동네 뒷산을 함께 올랐다. 경임은 기꺼이 나의 등산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매주 그와 산을 오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길 여러 번, 비로소 그가 지나온 20대, 30대, 40대가 보였다. 그동안 그와 싸우느라 듣지 않았던 그가 살아온 이야기들이, 이제야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경임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것을 참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잊은 지가 오래였던 것 같다. 코로나의 역설인지 재택근무 기간이 길어지며 그와 더욱 가까워졌다.


회사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았다며 재택근무에 이어 무급 휴가 소식을 전했다. 갑자기 출퇴근 시간뿐만 아니라 낮 시간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며칠 전이었다. 마침 맛집 할인 쿠폰이 있어 경임과 단 둘이 외식을 하러 갔다가 그녀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을 뻔했다. 식당에서 밥 먹다가 뜬금없이 울기가 민망해서 하염없이 밥만 쳐다보며 눈물을 삼켰는데, 내용은 이랬다.


40대의 경임은 어느 날 친언니의 주선으로 언니와 같은 지역 출신인 어떤 분과 소개팅을 했단다. 소개 자리에 나온 김은 경임보다 한 살 연하에, 미혼이고 아이도 없었다고. 그와 처음 만나던 날 그는 경임을 썩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고, 경임도 그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경임의 두 딸과 함께 사는 것은 싫다는 의사를 내비쳤다고 했다. 경임은 그 첫 만남을 끝으로 그를 두 번 다신 안 만났다고 했다. "왜, 좋은 사람이면 만나보지 그랬어~"라는 말에, 경임은 뭐하러 엄마가 너네랑 떨어져서 사냐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꾸했다. 40대의 경임에게 삶이란 여유 따위 눈곱만큼도 없는 빠듯한 것 그 자체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 딸이 '선택'이 아닌 '기본값'이라는 사실에, 그가 그런 선택을 함에 있어 망설임 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마음 한편이 저릿해왔다. 그리고 이제 다 지난 일이라는 듯, 가볍게 말하는 경임의 모습에 마음이 더 아팠다.


우리는 밥을 먹고 근처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낀 채,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여러 번 와봤던 터라 익숙한 풍경이었다. 경임과 한강변을 따라 산책을 하는 동안 그는 수줍게 고백했다. 한강 공원을 처음 와봤다고, 딸 덕분에 이런데도 와보게 되어서 고맙다고. 그러면서 흔하디 흔한 남산 타워 전망대도, 63 빌딩도 아직 안 가봤다며 해맑게 덧붙였다. 그 말에 나는 왜 그렇게 가슴이 철렁하던지. 친구들과, 옛 연인들과 수십 번은 찾았던 한강에 남산 타워였는데. 경임과는 함께 와볼 생각을 안 했던 스스로가 야속하게도 느껴졌다. 미안한 마음에 다시금 눈이 빨개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자주 오자."라고 답했다. 진심이었다. 그 날 하루를 마무리하며 경임은 눈을 마주치며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 하루 너무 재밌었다고. 고맙다고.


한강에서 엄마랑 수다를 떨며 엄마가 환하게 웃는데 왜 그 장면에서 나는 그렇게 눈물이 날 것만 같던지. 재미있었다고 말하는데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그리고 이렇게 함께 해주어서, 그동안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어찌나 말하고 싶던지. 나는 아마도 한강에서 환하게 웃던 경임의 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다. 그리고 언제나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던 엄마와 오랜만에 발 맞춰 걷던 그 날의 우리를. 우리의 첫 한강을.


그리고 언젠가 그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꼭 전하고 싶다. 엄마가 있어 내가 있을 수 있었다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엄마가 경임이어서라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바로 당신이라고. 꼭 진심을 다해 전하고 싶다.









이전 05화 엄마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