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어색한 만남이자 불편한 동거. 하지만 잘못된 만남은 아니다.
2013년 여름 한 국내 인권단체 기고를 위해 썼던 기업 인권 관련 글. 3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글을 내용의 가감 없이 옮겨 본다.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인권이라는 주제가 ‘전에 없이’ 중요해지고 있다.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권리에 대해 ‘전에 없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다소 어폐가 있지만, 최근 몇 년 새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국제적인 논의가 특별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세계 최대의 CSR 이니셔티브인 유엔글로벌콤팩트(UN Global Compact)의 10가지 원칙,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표준인 ISO 26000의 7대 핵심 주제, 그리고 개정된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에서 공히 인권을 가장 먼저 다루고 있다. 특히, John Ruggie 프레임워크로 잘 알려져 있는 기업과 인권 정책 프레임워크와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이 각각 2008년과 2011년에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기업과 인권에 관해 전 세계 기업 및 이해관계자들이 나아가야 할 이정표가 세워졌다.
기업과 인권 이행의 핵심 주체인 기업들의 노력도 최근 두드러진다. 지역사회 영향이 큰 채굴산업과 장치산업, 전 세계적으로 공급사슬이 복잡한 전기전자산업, 공급사슬에서의 노동집약도가 매우 높은 의류산업 등에서는 업계 차원에서 인권을 중요한 요소로 포함한 CSR 원칙을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도 CSR 차원에서 인권정책을 수립하고 인권 이슈 관리를 위한 체계를 갖춰 나가는 기업들이 점진적으로나마 증가하고 있다.
그만큼 기업경영에서 인권이 중요한 요소라는 공통된 인식이 기업과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비즈니스 환경에서 이러한 변화와 흐름이 피부에 와 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기업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과 주변 환경에 대한 대응은 상당히 거리가 존재한다.
한국에서 '기업과 인권'이라는 용어는 어떤 느낌을 줄까? 또는 한국 기업에게 인권을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활동들을 의미할까? 전부는 아니겠으나 대다수에게 인권은 그나마 익숙해진 CSR, 사회공헌보다도 더 생소하고 먼 이미지일 것이다. 반대로, 인권은 기본인데 인권을 지키지 않으면 사업이 제대로 되었겠는가라고 자신 있게 반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인권은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해서 현실적으로 경영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많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 기업들의 지속가능성 보고서나 여타 CSR 관련 대응 활동들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권 관련 이슈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이 기업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지속가능성 보고서에서 최대한 모호하게 작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아무리 심각한 이슈더라도 보고서 상에는 반 페이지 이상을 할애하지 않는다. 일례로, 지속가능성 보고서에 관한 국제적인 de factor standard인 GRI의 강제 노동과 아동 노동 부분 지표에 대해 대부분 한국 기업들은 “노동법을 준수하고 있다”라는 언급이 전부이다. 어째서 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적인 원인 중 하나는 바로 – 직장인뿐 아니라 – 모든 한국 사람들이 한 번도 인권과 관련된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독일, 프랑스, 덴마크 등과 같은 국가에서는 인권, 노동 등 인권 관련 주제가 공교육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이삼십 년이 넘게 인권에 관한 지식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다가, 사회인이 되어서야 인권 이슈를 간헐적으로 그것도 인권 관련 활동가나 전문가들을 통해 접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의 기업과 인권에 관한 논의 또한 시민사회단체 입장의 주장으로만 여기는 경우도 있고, CSR의 일부분으로만 인식하여 사회적 책임의 전략 중 하나로 여기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기업과 인권의 관계를 보다 잘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기업에게 인권은 사람에게 공기와 같은 필수 요소이다. 즉, 인권은 기업 나아가 모든 조직 운영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CSR 관련 규범들에서도 인권이 가장 먼저 논의되는 것은 인권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인권은 어떤 영역이나 프로세스보다는 사람과 연관된 모든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요소이다. 아울러 다른 고려사항들과 견주어 볼 때 대부분의 경우 우위에 놓여야 할 정도로 높은 우선순위를 갖는 규범(high priority norms)이다[i]. 캐럴 교수의 CSR 피라미드 상에서 인권의 위치를 따져보면 쉽게 어느 한 단계에 인권을 적용할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업의 책임 관점에서는 당연히 인권이 CSR의 요소로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권은 CSR과 달리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사항이 아니라 항상 적용되어야 하는 규범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 그리고 인권의 영역은 이해관계자의 관심 유무로 한정 지을 수 없는 포괄성을 띈다는 점에서 여타 CSR 이슈들과는 다른 특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인권은 선후 관계로 보자면 피라미드 상의 모든 책임보다 아래에 위치하며, 영역으로 볼 경우 모든 책임을 포괄하는 테두리 정도로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은 숨 쉬는 것이나 밥 먹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살아가지는 않지만, 이런 기초적인 활동이 없이는 누구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권경영을 기업의 미션이나 비전으로 삼고 기업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권경영은 기업경영에 있어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필수 요소이며 만약 무시된다면 이해관계자들의 인간다운 삶과 생명도 유지될 수 없다.
[i] 인권의 좌표, James W. Nickel, 명인문화사, 2010, p.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