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요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면 나는 거의 삼십 년 만에 다시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고아가 되었다. 나보다 오래 살 것 같았던 아버지. 집안의 장수 유전자가 무색하게 그는 칠십을 채우지 못하고 떠났다.
엄마가 죽고 난 뒤 아버지가 한참을 힘들어 한 건 사실이지만, 타고난 체질에 더해 건강에 유별나게 집착하는 면이 있어 건강한 음식을 챙기고 무리하지 않는 생활을 철칙처럼 지켰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건장한 노인으로 보이기 충분한 사람이었다. _자기 자신을 노인이라 생각한 적 없어 스스로는 노인이라 일컬어지는 걸 싫어했다.
그런데 한 번의 실기로 그의 몸과 마음이 다시 무너져 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 옛날 어린 내가 없었더라면 아버지도 사라져 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버려도 좋을지 모르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성향과 습성은 은근히 내게 배어 들어 나 또한 어떤 상황이 와도 어머니처럼 죽어버리는 일은 없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꾸준히 잘하는 일은 없어도 몇 년을 웅크리고 있다가도 늘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이 생기니, 미련이 많아 어디 죽을 수나 있을까?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고 돌아가시게 된 상황에서 생각보다 나는 의연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도 나는 다시 부모의 부재에도 멀쩡히 살아가는 인간이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주위의 말을 새겨, 밥을 챙겨 먹고 걱정보다 빨리 떨쳐 일어났다.
슬픔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하는 데는 허기만 한 것이 없다. 본능에 충실할 것. 그러면 또 어찌 살아지는 것이다. 나는 이기적 유전자란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더위가 시작되던 늦은 유월의 어느 날, 나는 이 차선 건너에 서서 플라타너스 잎으로 적당히 가려진 식당 단독 건물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고급 외제차 한 대가 건물 옆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차에서 내린 여자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카운터 쪽에 가방을 내려놓고 안쪽으로 들어갔던 여자가 다시 카운터 자리로 돌아와 홀을 바라보며 직원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지만 들고나가는 손님이 많아 식당은 제법 붐비고 있었다.
몇몇 단체 손님들이 나가고 조금 후, 카운터에 섰던 여자가 자리를 비키고 중년의 남자가 카운터에 나타나 설 때, 나는 곧바로 길을 건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 웬일이야 여긴.”
그는 나를 보고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식당일 때문인지 안 그래도 상기되어 있던 벌건 얼굴에 땀까지 맺혀 있던 남자의 눈썹 언저리에서 놀라움과 반갑지 않은 내색이 미세하게 섞여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이유가 아저씨 때문인데 저한테 할 말 없어요?
“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법적으로 다 끝난 얘기를. 여기 와서 이러면 안 돼!”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지만 식사를 하고 있는 손님들은 카운터 쪽을 응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서빙을 하는 한 직원이 남자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읽었고 이내 남자의 부인이 잰걸음으로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응,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곧 맞받아치는 그의 소리도 높아졌다.
“아니 미쳤어? 여기 와서 이러면 영업 방해야.!”
태도를 바꾸며 몸을 곧추세우는 남자와 기세 등등 남편의 곁으로 달려드는 여자가 같이 나를 밀치듯 가게 문 앞으로 떠밀어내는 순간, 분노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나는 카운터 옆 조그만 난 화분 받침 밑에 놓인 책을 확 빼내었고, 찰나에 화분이 쨍하고 깨져 버렸다. 말간 뿌리들이 드러난 난이 붉은 미사토 알갱이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사이 나는 재빠르게 손에 쥔 책을 깨진 화분을 바라보던 남자를 향해 던져버렸다.
하지만 내가 던진 책은 남자의 머리를 비스듬히 빗겨 나가 힘 없이 떨어졌다.
"여보!" 여자가 남편 이마를 살피고는 소리치며 다시 나를 힘껏 문 쪽으로 밀어냈지만 난 밀리지 않고 떨어진 책을 주워 문밖으로 나왔다.
귓가에 식당 안 사람들 모두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딸려 나오는 듯 들리다 문이 닫히자 잦아들었다. 난 그 길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와 천천히 다시 이차선 도로를 건넜다.
별것도 한 것 없이 손이 불불 떨렸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와중에 갑자기 배가 너무 고파졌다. 나는 이런 최상의 부조화스러움을 이미 아홉 살부터 알아버리지 않았나! 이제 당황스럽지도 않은 익숙함이다.
아버지의 후배. 다시 말하자면 사기꾼, 협잡배인 그 남자가 우리 집에 온 날, 딸내미 자랑삼아 내어 준 내 책이 식당 카운터 자리 화분 밑에 깔려 있었어도 그것을 보는 순간 그것이 내 것임을 단박에 알아봤다.
내가 그 사람을 처음 본 날 그의 정체를 한눈에 간파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 사람은 주의해야 할 사람 같으니 멀리 하시라는 다 큰 딸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도 무엇에 홀린 듯 그 남자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는 퇴직금의 절반을 밀어 넣었다.
내게는 이제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 사람에게 말 그대로 낚여 버리고도 한동안 아버지는 현실을 부정하듯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고 믿지 않았다. 나중에 생긴 빚은 아마도 이 때문에 그 후에 더 불어난 듯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제대로 발등을 찍히고 말았다. 어디 발등뿐일까, 노년의 팔자를 찍어 내어 수명을 단축했으니! 피라미드 맨 위에서 아버지와 같은 피해자를 여럿 남겼지만 예사 사기꾼이 아닌 그는 모든 걸 바지 사장 탓으로 돌리고 저렇게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큰소리를 치며 그 돈으로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이다.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주문을 하고 앉았는데, 고작 그 사람을 찾아가 책이나 던지고 와 배를 불리고 있는 수단 없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할 뿐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책을 보니, 누렇게 변한 종이 커버엔 물때처럼 생겨버린 동그란 화분자국이 있었다. 바로 보기 싫은 겉 커버를 벗겨내니 탄탄한 하드커버 속표지는 새 책처럼 멀쩡했다. 출판사에 부탁해 튼튼한 양장본으로 하길 잘한 걸까? 초판인쇄로 끝나버린 것을 생각하면 과했던 멋 부림이었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밥을 먹고 다시 찾아온 책을 내 새끼 챙기듯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살면서 법원에서 온 등기라는 것을 처음 받아 봤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추심원이 직접 집까지 찾아와 내용증명이 담긴 변제 독촉장을 내밀고 갔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추심원들이 몇 번 번갈아 오가고 나니, 나는 실로 난감한 상황이 이런 것이구나 절감했다. 어찌해야 할까? 계속 한두 건 씩 쉬지 않고 날아오는 독촉장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시청에서 운영하는 무료 변호사를 찾아 자문을 구하고 내 앞으로 남겨진 빚들을 선제적으로 찾아 갚아야 하는 상황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 나가야 할지 알려주는 대로 따라갈 수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시청을 몇 번씩 오가고 얼추 한 달이 지나자 그런대로 해결이 되어 나가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보 같은 안도.
아빠가 남겨준 유산은 30년이 훨씬 지난 변두리 21평 아파트. 그리고 그 아파트를 담보 잡혀 낼 상속세, 그리고 청산해야 할 빚들. 그리고 아빠 가게에서 나온 한 트럭도 넘는 수석들이었다.
퇴직 후 수석가게를 열면서부터 애지중지하며 팔지도 않아 가게 세도 밀려가며 떠안고 있는 돌들이었지만 나는 그저 처리해 주는 조건으로 그 모두를 옆 수석 가게에 넘겼다.
이제 뭐가 더 남았으려나 아버지가 남긴 것들이 더 이상 불거져 나오지 않기를 소망하며 나도 제대로 된 밥벌이를 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글 그림 반디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