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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루시아 Dec 08. 2019

생명이 자라는 냄새

딸의 시간 1


서른 살에 태어난 딸은 나와 함께 석사학위를 받았다. 딸은 뱃속에 있으며, 실험을 준비하고, 피험자를 고르고, 실험을 하고, 설문지 코딩과 SAS 통계를 돌리고, 데이터를 정리하여 논문을 쓰고, 논문 발표를 하며 나와 함께 논문을 통과시켰다. 딸은 실험실 데이터 로고를 세팅하다 감전이란 놀라운 일을 당하기도 했으나 뱃속에서 묵직하게 뭉치는 것으로 놀람과 힘듦을 표하였을 뿐,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나로 인해 지쳤을 법도 한데 무엇 하나 나를 힘들게 한 게 없었다.


제왕절개 수술로 딸을 낳아선지 몸의 부기가 다 빠지지도 않은 날 학위를 받았다. 2년 동안 쉬지 않고 공부를 하던 난 ‘내가 언제 공부를 했던가’ 하듯 학위장을 책꽂이에 꽂고 딸에 집중했다. 딸의 음악을 듣고, 딸의 장난감을 흔들고, 앙증맞은 작은 그림책을 보고, 딸과 누워 딸의 옹알이를 들으며 "어~, 배고파?, 트림하고 싶어?, 졸리는구나!, 이제 놀고 싶어?, 아~나가고 싶어?" 등  되지도 않는 맞장구를 쳤다. 딸이 새곤이 잠이 들면 옆에 누워 졸다 한 줌도 되지도 않던 딸의 옷가지를 빨고, 널고, 개며 참 오랜만에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 시간은 딸이 내게 준 황금 같은 시간이었고 난 그저 그 시간을 금쪽같이 받아썼다.


 천 기저귀가 아이 몸에 좋다던 엄마와 언니들의 말에 뽀얀 천 기저귀를 3일에 한 번은 푹푹 삶았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바둥대는 딸에게 쭉쭉이를 하고, 점심 후엔 날씨에 상관없이 딸을 어깨에 메곤 동네 공원을 나가 나무 이름, 꽃 이름, 길 이름, 건물 이름을 속삭이며 바람을 쐤다.


집은 아기 냄새, 빨래 삶은 냄새, 파우더 냄새가 어우러져 달콤하면서도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향긋한 꽃 내음 같은 향기로 가득 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생명이 자라는 냄새'가 아니었을까 싶다.  


수술과 딸의 황달로 일주일이 넘게 병원에 있으며 모유수유를 못해 혹여 분유를 먹여야 하나 했지만 딸은 친정 집에 오자 빨던 젖병을 마다하고 내 가슴에 매달려 배불리 먹었다. 나의 엄마는 모유를 배불리 먹고 자는 딸을 안고선 “네가 다섯 중 젖이 제일 잘 돌아 배부르게 먹었다”며, “모유가 좋아 다행이다”하셨다. 큰 언니, 작은 언니가 모두 흡족한 모유수유를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던 터에 내가 딸을 안고 모유수유를 하니, 아이 다섯을 낳아 젖을 먹였던 엄마는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딸은 젖을 먹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한참을 먹고 나선 신나게 놀았고, 산책이나 목욕 후엔 젖을 양껏 먹고 쉬이 잠들었다.  배부르게 먹은 후엔 잘 자고, 실컷 자고 나선 두리번거리며 잘 놀았다.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조바심은 딸이 새근거리며 자는 소리와 함께 옅어졌다.


내가 편안하다 생각하여 딸이 편안했는지, 딸이 순하고 편안하여 내가 편안했는지 모르겠다. 작고 여린 생명임은 분명하지만 나에 의해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는, 다 자기 그릇, 자기 삶, 열린 세상을 살 것이라는 무작정의 확신이 있었다.


남편 퇴근을 기다리며 저녁 준비를 하던 시간엔 늘 동물의 왕국을 틀어놨었다. 내가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딸을 보여주려던 것이었는데, 막상 그 프로를 보며, '탄생과 죽음, 경쟁과 공존, 모성의 보편성과 자연의 불인(不仁)함을 반복적으로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막 태어난 가젤도 후들거리는 긴 다리를 펴자마자 어미를 따라 걷고, 막 새끼를 낳은 그 어미도 새끼를 이끌고 태연히 사는데, 나와 딸이 그 가젤 만도 못할까 싶었다. 모성의 보편성과 생명의 강인함을 배우는데 동물의 왕국만 한 게 없었고 딸은 하루게 다르게 자라며 내게'생명의 자기 성장'을 일깨워줬다.   


마지막 졸업학기에 딸은 취업을 했다. “엄마, 다음 주부터 출근하기로 했어요”, 핸드폰으로 전해지는 딸의 목소리에 미소가 한껏 들어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무실에 앉아 주어진 일을 한다 하니,


돌이 되기 전 내 손을 잡고 후들거리는 긴 다리로 한 발씩 걷던 딸이 뛰어다니는 가젤이 된 것 같아 그저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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