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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똥과 똥파리, 이정표

by 정루시아

둘은 20km를 걷고 마침내 오르막길에 들어섰다. 좁은 산길에는 소똥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냄새나는 소똥을 피해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던 둘은, 어느 순간 자신들이 똥파리 떼와 숨바꼭질하듯 걷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통실하고 윤기 도는 수많은 똥파리들이 소똥 위를 뒤덮고 있다가, 순례자들이 발을 디딜 때마다 사방으로 화들짝 날아올랐다.


숨을 헐떡이며 산을 오르던 중, 말 탄 목동이 열댓 마리 소를 몰고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앞뒤로 세 마리 개가 소들을 몰고 있었고, 개들은 순례자 쪽을 피해 반대쪽으로 유도하며 지나가는 이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모습은 초라했지만, 영민한 개들이었다. 수연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신기한 듯 활짝 웃었고, 주미는 오르막 초입부터 있었던 소똥의 주인이 바로 이 소들이었음을 깨닫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경사가 가파른 그 길에서, 목동은 말 위에서 순례자들을 내려다보며 “워워~” 하고 소들을 다독였다. 덩치 큰 소들과 눈이 마주친 수연이 조용히 말했다.


“소 눈이 참 예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인 것 같아.”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능선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걷던 둘은 마침내 ‘갈리시아 지방 입구’ 표지석 앞에 도착해 사진을 찍었다. 먼 길을 걸어왔다는 감회에, 둘은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수연은 구글맵을 켜고 지나온 길을 되짚었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 카탈루냐 주, 아라곤 주, 카스티야 이 레온 주를 지나 마침내 갈리시아 주에 들어선 것이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긴 여정이었다. 지도를 따라가며 팜플로나, 로그로뇨, 부르고스, 레온 같은 대도시 이름을 소리 내어 읽던 둘은, 동시에 갈리시아 표지석을 다시 바라봤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마지막 주 경계에 선 그 순간, 둘의 가슴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주미가 길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 새벽만 해도 언제 이 길을 다 걷나 싶었는데, 벌써 여기까지 왔네. 인솔 팀장 따라, 이정표만 따라 걷었을 뿐인데 정말 멀리 왔어! 목표가 눈앞이다. 그런데 길을 걷다 보니 생각나더라. 결혼 후 내 인생은 그냥 어둠 속을 계속 배회한 것 같아. 어릴 땐 사는 게 대낮처럼 환했거든. 욕심도 없고, 부족함도 없고, 부모님 울타리 안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알겠더라. 결혼하고 살면서 난 내 이정표 없이, 남편이나 아이들의 이정표를 내 것인 양 기웃거리며 살아왔다는 걸. 그런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서… 좀 당황스럽더라.”


주미는 스스로도 한심하다는 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수연은 앞서 걷는 주미를 올려다보며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똥파리도 자기 목적은 정확히 알고, 소리가 나면 피했다가 다시 내려앉을 곳이 어딘지 아는데… 나는 그냥 모르고 계속 배회한 것 같아. 그런데 오늘 올라오다 처음으로 소 눈을 들여다봤는데, 그렇게 순박할 수가 없더라. 그 눈 속에서 나를 본 것 같았어. 너무 순해서 목동이 하라는 대로 하는 그런 순한 소 말이야. 난 내 삶에 주인인 적이 있었나? 나만의 이정표가 있었나? 똥파리도 아는 그 목적지 말이야. 위험할 땐 피하고, 괜찮아지면 다시 앉을 자리를 아는…”


주미의 말에 수연은 스틱을 꼭 쥐고 걷다가 주미를 불러세우며 말했다.


“네가 부모로서 좋은 울타리를 쳐줬으니까, 네 아이들이나 남편은 대낮 같은 삶을 살았을 거야. 어둠 속을 배회했다는 말은 하지 마. 그들이 알든 모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네가 중심을 잡고 있었기에 가족이 평안했던 거야. 그건 충분히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간이야. 그걸 의심하지 마. 그래도 지금 너만의 이정표를 만든다니 대찬성이야. 이제 애들도 다 컸잖아. 우리도 숨 쉴 수 있어야지.”


주미는 수연의 말에 촉촉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수연은 주미를 향해 번쩍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빠르게 말했다.


“이정표~ 좋다. 남들이 뭐라하든지, 우린 아직 젊어. 산티아고 순례길도 걷는 걸. 이정표 잘 만들어 봐라, 주미야. 나도 그거 구경하러 갈게.”


주미와 수연은 서로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순례길이 줄어들수록 이 일상이 점점 더 그리워질 것 같았다. 몇 년 후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서로에게 묻기도 하고, 다음엔 단체 팀 말고 둘이서 개별로 오자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웠다. 마치 어린 소녀들처럼, 꿈을 말하듯,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며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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