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치명 Apr 05. 2021

성스럽지 못한

외설

 얼마 전 한 소설가의 포스팅을 읽었다. 자신의 소설은 성 행위를 대담하게 묘사하고 있으나 분명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이었다. 대형 서점에서 지나친 성 묘사로 인해 매대에 진열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면서 억울해 했다.


 대형 서점은 청소년 구매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이 외설 취급을 받았다면 상당히 불쾌해 했다. 나는 대형 서점의 입장도, 소설가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됐다. 그런데 외설이면 어때서, 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는 박사 과정을 할 때 Z강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가 자신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면서 교수들한테 나를 씹고 다녔다. 원래 나는 낯도 가리고 누군가에게 친절한 성격이 아니다. 부디 나 좀 잘 봐달라는 불편한 자리를 굳이 마련할 필요를 못 느꼈다. 수업이나 그 외의 시간에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결석 한번 하지 않고 리포트도 다 냈건만 나는 B뿔이라는 성적을 받았다. 박사에게 B뿔은 디와 마찬가지 성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창작 수업이었고 Z강사가 내 작품을 존망 이라고 이야기하면 끝이었다. 뭐, 그럴 수 있지. 개인의 취향이니까.


  예술이라 우겨도 외설이라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고 외설이라 우겨도 예술이라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소설가든, 시인이든, 동화작가든, 평론가든, 화가든, 영화감독이든 작품이 창작자의 손에서 떠나면 판단은 오롯이 타인의 몫이 되는 것이 아닌가.


 부산국제영화제에  동행했던 친구  덕분에 '숏버스'라는 영화를 알게 되었다. '헤드윅' 존 캐머런 미첼 감독의 영화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상영 불가 판정을 받았다. '숏버스' 배급사 관계자는 예술과 외설은 종이 한 장 차이라면서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나는 '숏버스'를 보는 내내 감탄했다. 상당히 불편하기는 했지만 '숏버스'에서 자유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숏버스'를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하지 못한 사람들의 꿈, 쾌락, 고통, 유대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데 내가 예술이라고 하면 예술이 되나. 외설도 마찬가지이고. 싫으면 안 보면 된다. 보더라도 나만 예술, 혹은 외설이라고 판단하면 된다. 강요는 참 쓸데없는 짓이지.


  귀스타프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을 발표하고 풍기문란과 종교 모독죄로 기소됐다. 무죄 판결을 받은 그는 프랑스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았다. (대입 면접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세계 고전을 묻길래 나는 '보바리 부인'이라고 대답했다. 순간 교수들이 당황했다. 물론 나는 불합격이었다.)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역시 음란물 재판을 받았다. 미국에서 먼저 재판을 받았는데 성 위 묘사는 문학적 특색이며 솔직한 표현을 하고 있는 리얼리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연히 판결은 무죄였다.


 타인의 가치관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예술과 외설의 기준이 아닌가. 외설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술을 하면 이 세계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 누구든 눈치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내공이 쌓이면 '빨간 책'을 내보고 싶다. 현실 막장들을 수집 중인데 묘사가 안 되어서 못 쓰고 있다.  슬프다.

이전 24화 성스럽지 못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