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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평 Jan 13. 2020

당신은 지금 파리에 있다

파리 여행자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프랑스 시간으로 저녁 7시 반이 넘은 시각,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한다.


열두 시간이 넘는 비행을 끝마친 데다,

한국시간으론 새벽 3시 가까이 될 테니

어마어마하게 피곤할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캐리어를 받아 공항을 빠져나오다 보면

파리 시내로 갈 수 있는 티켓인 RER 판매기와 마주친다.

몇 번을 와봐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그 기계와의 씨름 끝에 2장의 티켓을 손에 거머쥔다.


그렇게 열차에 올라 환승을 거듭하다 보면 베흑씨 역이다.

10분 남짓 공원길을 따라 걸으면서는

“와- 파리다. 우리가 파리에 왔어. 오고야 말았어!”

라며 조잘조잘.


도착한 숙소에서는 방을 안내받자마자

지친 몸을 잠깐 누일 것이다.

오늘의 당신에게 씻을 수 있는 체력이 남아 있길 바랄 뿐.




눈을 떠보니 새벽 즈음이다.

일요일이 되었지만 다음날 출근으로 머리 싸맬 일은 없다.

여행자의 특권이지.


다만 시차적응이 되지 않은 탓에

휴대폰을 살피거나 일기장을 꺼내들테다.

정 아니라면 눈을 감아 다시 양을 세어볼 것이다.


그렇게 찾아온 아침엔 베흑씨 빌라주의 빵집에서

갓 구운 빵과 과일, 주스를 사 온다.


당신의 아침이 이보단 근사할 것이라 믿는다


“자 봐봐. 이게 프랑스 빵이야.” 하며

같이 여행을 떠나온 엄마에게 별것 없는 생색을 낸다.

파리 여행이 처음인 그녀는 신이 났는지 시원하게 웃는다.


잔뜩 허기진 배를 든든히 채운 뒤 다시 메트로로 향한다.

까르네 결제!

순식간에 내 손엔 10장의 티켓이 쥐어진다.


그 길로 몽마르트르행 열차에 오른다.


몽마르트르 묘지. 그곳엔 공기도 멈춘듯하다.


몽마르트르에 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묘지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예술과 사람'.

그 ‘사람’이 남아있는 장소엘 간다.

에드가 드가와 에밀 졸라, 쇼팽 등이 잠들어 있는 곳.


시끄러운 세상에서 잠시 사라져

흔적 없는 그들과 만나본다.


고요한 조우 후 다시 세상에 나와보면,

고흐의 아파트가 바로 앞에서 반긴다.


얼룩덜룩해도 따뜻한 베이지색 건물에

포인트가 되는 파아란 문이 참 예쁘다.

여기에 오길 참 잘했구나 싶은 순간이다.


54 Rue Lepic, 75018 Paris, France


그렇게 자근자근 걷다 보니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보인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또 가줘야지’ 하는 큰 마음을 먹고 짧은 다리를 쭈욱 뻗는다.

상아빛 성당 앞에 다다르니 촥 펼쳐진 파노라마가 있다.


경사진 잔디밭도 괜찮다


잠깐 앉아 바라보다가, 또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또 언덕 내리막길이다.


메트로는 다시 부르델 미술관을 향한다.


그냥 길조차 낭만적인 것은 기분 탓일까


부르델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유명하다는

<젊은 날의 초상> 하나를 보려는 목표만은 뚜렷하다.


엄마의 추천으로 언젠가 읽었던 서경식 교수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한 구절 때문일까.


르네상스 이후의 조각가들은 한결같이 스스로의 개성이나 독창성을 믿고 이러한 어려운 싸움을 거듭해온 것이리라. 더구나 그 재료는 수백 년이 지나도 부패하거나 변질되지 않는 돌이다. 그것은 켜켜이 퇴적된 스스로의 문명 그 자체와의 격투라고도 할 수 있다. 신기에 흐르지 않고 범용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가진 전인간력을 기울여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부르델의 작품 중에서는 역시 나는 <빈사의 켄타우로스>에서 그러한 고투의 흔적을 느꼈다.

자신의 인간력을 몽땅 기울여서 나 또한 무엇인가를 해야지,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늦지 않은 것일까? 20대의 나날들이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을 생각하니 콕콕 가슴이 아팠다.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159쪽


 사람의 전인간력을 기울인 창조의 고투!

인생의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에게

이렇게나 좋은 교본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앙투안 부르델, <젊은 날의 초상>


그런데 그림보다도 뜻밖의 공간감이 당신을 압도하고 만다.


아차차! 이 사람 보기보다 대단한 조각가였던 거다.

스승은 로댕이오 제자는 자코메티니, 말을 다 한 셈이다.


전시실 문 옆에 작은 의자가 하나 있다. 가만히 앉아 숨 쉬어볼 것을 권한다


부르델의 아뜰리에 바깥도 보통은 아니리라


놀라운 공간, 도무지 발을 뗄 수 없는 그곳에서 겨우겨우 빠져나온다.

나의 불어 능력만 허락한다면 무료해 보이던 그 직원을 대신하여 미술관 문을 열고 닫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근처에서 보들레르와 보부아르, 샤르트르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몽파르나스 묘지에 다다른 게다. 엄마의 시간이다.

새소리도 들릴 테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소리와 나무소리, 발자국 소리가 들릴 테다.


20세기 중반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계약결혼의 당사자들은 여전히 매력적인 자태로 잠들어있다


그러고 보니 반년만에 파리에 왔다는 사실에 취해

너무 많이 걸었다.

허리가 욱신하고 발이 아파온다.

안 되겠다.

비장의 카드로 에펠탑을 꺼낸다.


어쩔 수 없다. 나에게 파리는 에펠탑이니까.

내일부턴 본격적인 미술관 투어가 시작될 테니까.

어쩌면 내일은 비가 올지 모르니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마르스 광장에 누워 한가롭게 에펠탑 한 번, 사람 한 번을 보는 것,

와인 한 잔, 빵 한 입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건

파리를 여행하는 자의 도리란 말씀이다.


수줍게 보이는 에펠탑의 머릿 꼭지와 싸구려 와인이 함께하는 오후란!


이래저래 파리에서의 두 번째 해도 저물어갈 것이다.

그다음 해가 떴을 때, 또 그다음 해가 떴을 때엔

당신은 루브르와 들라크루아, 퐁피두, 뻬흐라쉐즈 묘지, 오르세와 로댕, 피카소,

지베르니와 오베르 쉬르 우아즈, 베르사유,

개선문과 오랑주리, 마르모탕,

에트르타와 옹플뢰르, 몽생미셸에 있을 것이다.


겨울의 파리와 여름의 파리가 어떻게 다른지,

아니 이 순간의 여기는 어떤 감촉인지를 느껴볼 것이다.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오감으로 기억할 테다.

해를 맞이하는 일이 몹시 즐거워진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 두라고.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 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모습이니 눈과 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 대도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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