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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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배급아카데미 시아님이 조연출을 맡으시고 정시상영단 단원 중에서도 보조출연으로 참여한 <영화의 시간>이 있어 개봉 전부터 제작 소식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시사회로 미리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와 광화문 <씨네큐브>로 갔다. 3편의 단편 영화를 엮은 앤솔로지, <극장의 시간들>은 함께 웃고, 울고 꿈꾸며 언제나 변치 않는 친구가 되어준 극장과 영화에게 보내는 시네마 러브레터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극장과, 그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 그리고 함께 영화를 보며 흐르는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
침팬지
2000년 광화문, 고도, 모모, 제제는 영화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단짝이 된다. 예술영화 볼 때 팝콘을 먹는 건 좀 아니지 않냐며 시네필 부심을 부리기도 하고, 그렇게 들어간 영화관에서 내내 졸다 나오기도 하지만 이 셋은 잘도 쏘다닌다.
그리고 헌책방에서 신기한 침팬지 이야기를 발견한 고도는 침팬지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동물원에 간다. 침팬지가 핀란드에서 넘어왔고, 3마리 중 한 마리만 남았다고. 그리고 그 남은 한 마리가 동물원 지하에서 울고 있다는 이야기의 진실. 동물원에 간 세 친구는 그 곳에서 신기한 침팬지 이야기의 주인공인 침팬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영화감독이 된 고도는 홀로 광화문을 걷다가 다시 침팬지 이야기를 만난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 셋이 함께 보았던 이상한 침팬지 이야기는 없다. 세 친구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고 말하며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들을 생각하던 고도는 침팬지의 안부가 궁금하다. 지금도 동물원 지하에 있을지 모르는 침팬지. 분명 세 마리 중 한마리만 살아남아 울부짖고 있는 침팬지를 내 눈으로 본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는 그 침팬지. 책의 내용이 바뀐건지, 그때의 내 기억이 이상한 건지 알 수 없다.
과거의 추억을 영화로 만드는 내내 친구들, 친구들과 보낸 시간에 대해 생각했을 거다. 시간이 흐르고, 친구가 사라지고, 이 영화를 왜 만들었냐는 사람들의 말에 대답하는 건 혼자 남은 나 뿐이다. 침팬지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 침팬지가 잘 있다면 나의 흘러가버린 친구들도 잘 있다고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극장에서 보낸 시간들이 결국 영화로 만들어진다. <침팬지>는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영화를 만들고, 그래서 결국 우리를 다시 극장에 잡아두는 모든 시간들을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반가운 얼굴이 많은 영화였다. 고아성과 서수빈을 한 화면에서 보니 웃음이 나온다. 무더운 여름의 영화 촬영 현장에서 어린이 배우들이 동네 곳곳을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고 있다. 조잘거리며 떠들고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소리를 지르며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아이들. 그들은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아이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걸어오는 장면을 찍는 감독은 말한다. 더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도대체 자연스러운 건 뭘까? 어차피 영화 속 모든 장면은 전부 연기다. 오케이 컷을 위해 슬레이트를 몇번이나 다시 치고 백을 뒤집으며 여러 각도로 똑같은 연기를 몇번씩 하는 모든 순간들은 부자연스럽기 마련이다. 초코라떼를 먹으며 신이 난 아이들 사이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추가를 외치는 고아성 감독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운 연기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가은 감독의 화면은 어쩐지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아이들이 진짜 즐겁게 촬영할 수 있도록 노력한 감독과 스태프들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자연스럽게>는 스크린에서 진심과 노력으로 이뤄내는 귀한 자연스러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영화의 시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영화였는데, 다정하게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의 이름을 부르는 오프닝을 보며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화면에 나오는 모든이들의 시간을 알아주는 느낌이라서. 그리고 극장에 앉아있는 우리에게 한명 한명의 이름을 말해주는 목소리가 더욱 진심같이 느껴졌다.
친했다가 시간이 지나며 멀어진 친구인 우연과 영화는 씨네큐브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우연에게 공짜 티켓을 받은 영화는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기 시작하지만 내내 자버린다. 영화 말고도 모든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잔다. 감독은 자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자신의 영화를 소개한다. 영화제에 가면 그런 영화들이 있다. 아침 9시 1회차 상영이거나, 혹은 정말로 재미가 없어서 모든 관객들이 숙면타임을 가지고 나오는 영화. 하루에 영화를 3개쯤 보면 그 중 하나는 끝나고 나서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여기는 서울 한복판의 씨네큐브이고, 잠에 취한 관객들을 눈앞에 두고도 감독은 굴하지 않고 영화를 소개한다. 어쩐지 씁쓸하지만 모든 관객들은 그 영화가 나오는 동안 잠이라는 같은 시간을 경험한다. 이것마저도 극장의 시간같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
우연은 결국 깊게 잠이 든 영화를 영화관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함께 과거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밥을 먹으러 팔짱을 끼고 영화관을 나선다. 영화관에서 만나 영화 한편을 보고, 영화관 밖으로 팔짱을 끼고 나선다. 극장은 누군가와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곳이고, 스크린은 누군가를 추억할 거리들을 우연히 던져준다. 정해진 시간에 불이 꺼지고, 같은 심장 박동을 공유하고 함께 웃고 운다.
시작시간에 늦어 영화관에 들어가지 못한 상훈은 날짜를 착각했음을 깨닫는다. 영화를 놓치진 않은 셈이 되었지만 반차를 쓰지 못해 그 영화를 내일 볼 수 없다면 결국 극장의 시간은 상훈에게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7시 30분 시작 영화인데 28분에 1층 문을 열고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내려가던 나와 겹쳐 보이던 모습이다. 그 극장 속 모두와 같은 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싶은 마음.
이 영화를 보아야 한다면 꼭 씨네큐브에서 보기를 바란다. 영화를 보러 씨네큐브로 걸어가던 순간의 나까지도 영화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같은 스크린을 마주두고 보내는 시간들에서 같은 마음을 느낀다. 극장의 시간은 함께 흐른다.
- 배급아카데미 6기 정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