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잔향의 문
7월 23일, 토요일. 이른 아침, 창밖은 숨이 막힐 만큼 맑았다. 햇살은 창틀을 넘고 커튼 사이로 들어와 바닥을 조용히 덮었다. 하지만 커튼은 젖히지 않았다. 그건 오래된 습관이었고, 동시에 어떤 불길함을 막는 작은 의식처럼 느껴졌다. 새벽에 깼던 이유는 딸 때문이었다.
꿈속의 그녀는 전보다 나이를 더 먹은 듯했지만, 말투는 변함없었다.
“이 집에, 우리 둘만 있는 거 맞아?”
그 말은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섬뜩했다. 나는 깨어났고, 베개 밑이 축축해져 있었다.
주말의 도심은 평일보다 천천히 움직였다. 브런치 카페, 공원, 지하철 출입구 근처에서 커피를 손에 든 사람들이 옅은 그림자처럼 흘러갔다. 나는 오전 내내 집에 있다가, 오후 늦게서야 밖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멍하니 걷고 싶었다. 그러나 문을 나서는 순간, 연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무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연, 다시 떠오르지 않아?”
그 질문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어떤 이상한 공명을 건드렸다. 나는 대답 대신 차에 올랐다. 도로는 뜨겁고 차창은 뿌옇게 더럽혀져 있었지만, 마음은 그보다 더 혼탁했다. 연후가 말한 건 예전에 하연이 살던 동네의 한 부동산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하연이 남긴 메모 비슷한 것을 관리인이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곧장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연과 함께 갔던 카페에 먼저 들렀다. 3년 전 어느 날, 그녀는 내게 말했다.
“기억은 저장되는 게 아니야. 재구성되는 거지.”
그 말을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후에는 조금 알 것 같았었다. 기억이라는 것은 경험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오늘의 기억은 어쩌면 과거의 그것과 다르다. 같은 장면이라도 다르게 들리고 다르게 보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부동산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관리인은 반쯤 닫힌 셔터 너머에서 내게 말했다.
“그거요? 어딘가에 있긴 할 텐데…”
그는 오랜 시간 정리를 미뤄온 창고에서 먼지 낀 박스를 꺼냈다. 그 안엔 낡은 메모지, 열쇠,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사진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 겉봉투에 적힌 손글씨가 있었다. 낯선 손글씨였다. 그러나 묘하게 익숙한 결이 스쳤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머릿속 어딘가가 반응했다.
[이걸 찾았다면, 당신은 기억을 잃은 사람이야. 하지만 아직 복원할 수 있어.]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글을 읽자마자 온몸이 서늘해졌다.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고 나와 차에 올랐을 때, 다시 꿈이 떠올랐다. 딸이 했던 말. ‘아빠가 먼저 말해줘야 해.’ 그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묻지 않으면, 그 어떤 정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메모지의 글귀를 다시 꺼내 속삭였다.
“복원,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며 하연이 살았던 아파트를 지나쳤다. 그 불 꺼진 창문 중 하나가, 마치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라디오에서는 우주의 가속 팽창이 멈췄다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주 중, 국립천문대와 공동 연구소가 정식 발표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용히, 그러나 무언가 큰 흐름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하연을 기억하고, 딸을 떠올리고,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묻는 날이었다.
7월 24일, 일요일. 일요일 아침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어쩐지 흐리고 부드러웠고, 새소리도 유난히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커튼을 젖히자 고요한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이 바람도 없이 서 있었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천천히 커피 가루를 컵에 담았다.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는 주말이지만, 몸 어딘가엔 계속해서 지난 며칠의 기이한 감각이 남아 있었고, 꿈에서 본 딸아이의 말투도 지워지지 않았다.
“아빠가 먼저 말해줘야 해.”
그 말을 곱씹으며 커피에 얼음을 넣었다. 커다란 텀블러를 들고 거실로 가다 말고, 멈춰 섰다. 식탁 위에 놓인 외장하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저녁, 말조차도 안 돼지만 하연의 흔적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전 자료들을 복원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어떤 파일도 확실한 단서를 주진 않았다. 대신, 하나의 오래된 파일명만이 눈에 밟혔다. 08JH34_L4.dat. 확장자도 익숙하지 않고, 열리지도 않았지만, 그 안엔 단순한 숫자열 외에 이상한 문장 몇 개가 포함돼 있었다.
retrace.initial.memory.
그리고,
phase.confirm.leehayun.
나는 그 문장들이,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도 알려준 적 없는 내용이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기억 복구’ 혹은 ‘재현’과 관련된 코드처럼 보였다. 하연의 이름이 붙은 문장은 특히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녀가 죽기 전, 남겼을지도 모르는 어떤 흔적. 혹은, 시스템 내부 구조를 추적하려는 무언가의 시도.
점심 무렵, 나는 아무 말없이 차를 몰고 하연의 옛집 근처로 향했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늘 보던 길인데도 낯설었다. 골목마다, 전에는 없던 표지판이나 간판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차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던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조태호 씨?”
돌아보니 처음 보는 중년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하연의 집 이웃이라고 소개했다.
“예전부터 몇 번 본 적 있어요. 그런데 하연, 그 사람 마지막에 당신 이야기 자주 했거든요.”
“마지막이요? 무슨 이야기였나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당신이 자꾸 꿈에 나왔다고요. 마치 이미 죽은 사람처럼.”
나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하연이 나를 ‘죽은 사람처럼’ 꿈꿨다는 말은 너무도 역설적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이미 무언가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방향이 바뀌는 것.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세상이 혹은 세상들이 뒤틀리는 것.
그날 저녁, 나는 노트북을 열고 다시 외장하드를 연결했다. 파일은 여전히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텍스트 뷰어에서 무작위 추출을 시도하자, 한 문장이 화면에 떴다.
restore:hyeon.instance/0x002
그건 명령어였다. 무언가를 복원하라는 시스템의 명령. 하연이라는 인스턴스를 호출하라는 요청.
나는 얼어붙은 손으로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이미 얼음이 다 녹아 물처럼 싱거워졌지만, 혀끝에 감기는 쓴맛만은 여전했다. 밤이 깊어지자 다시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딸을 만났다. 이번엔 그녀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아빠, 진짜 이름을 잊어버린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꿈속에서도 침묵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딸은 나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아빠는 조각났어.”
그 말은 깨달음처럼, 혹은 경고처럼 느껴졌다. 나는 조각나 있었다. 기억도, 정체도, 관계도. 그 어떤 것도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복원하려는 것은 누구였을까. 하연? 딸? 아니면,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