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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2부. 흔들리는 계단

by 융 Jung

거실 탁자 위에 딜도를 올려두고, 나와 연후는 각자의 잔을 손에 쥔 채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딜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연후는 뭔가를 파악해 보려 애쓰는 눈치였지만, 그가 무언가를 읽어낸 것 같지는 않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망설이는 침묵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소파의 쿠션이 내 허리를 살짝 밀어 올렸고, 커피가 식어가는 소리가 귀에서 들릴 듯했다. 연후는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나도 마셨다. 쓴맛이 혀끝을 쓸고 지나갔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조심스럽게 딜도를 들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묵직한 무게감이 손바닥에 실렸다. 지나치리만큼 실제의 피부를 모방해 그 촉감에 나는 진저리가 났다.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미세한 탄성도 징글징글했다. 딜도의 표면은 아주 조금의 먼지가 묻어 있었을 뿐 전반적으로는 깨끗했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흉물스러웠다. 그 순간, 표면과 약간 어긋나는 선이 손끝에 걸렸다. 쇠심줄 같이 흉포한 거인의 음경, 그 아래쪽 힘줄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이음매가 아니라 칼집 같은 틈이었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칼집 같은 틈이 있어. 단순한 표면 흠집은 아니야. 안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그는 고개를 숙이고 홈이 있는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내가 뭔가를 할 새도 없이, 그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내가 처음 하나를 발견했을 때, 내가 말한 적 있지? 타살인 것 같다고. 내가 하나 집에 갔을 때 제일 먼저 본건 하나의 정수리였어.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머리카락도 아래로 쓸어내린 듯이 늘어져있더라. 내가 급하게 문을 젖히고 들어서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게 꼭…… 귀신같더라." 나는 채근하지 않고 그가 말을 이을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평소에도 내가 말없이 들르면 늘 입고 있던 상아색 실내용 원피스를 그때도 입고 있더라. 목욕가운 허리띠 같은 걸 목에 감고, 무릎을 꿇고……. 팔은 축 늘어져 있었어, 손끝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내가 바로 눕힐 때서야 그 팔도 굳어있는 걸 알았어. 처음엔 실수로 저지른 자살이라고 생각했어. 너무 두서없게 얘기해서 미안하다. 아니, 아무튼 그렇게 보였으니까.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자기색정사—라고, 용어도 있어. 사람이 자위를 하다가 스스로 목을 조르면서 쾌감을 하…… 씨팔. 아니 근데, 이상했어. 내가 구급대원인데. 죽은 사람, 자살한 사람을 하루이틀 보는 직업이겠냐고. 무언가 분명히 이상했거든. 그런데, 처음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뭔가 이상한 거야. 자세가 굳어있으니까 옆으로 뉘었는데 꼬리뼈에 뭐가 툭 튀어나와 있더라. 이 썩을 물건이 하나 몸 안에 깊숙이 꽂아져 있는 채였다고. 말이 되냐 이게? 생전 그렇게 싫어하던 러브젤이 놓여있질 않나, 야. 저 크기를 좀 봐라. 저게 맞냐? 처음에는 놀라서 실감이 안 나다가 그걸 보고서는 현실감각도 사라지더라. 그래도 어떡해. 기가 막힌 와중에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 그러면서 저 물건 끄집어 꺼내고, 사진 찍고—직업병이 진짜 무서운 거다 너—, 경찰에 신고하고, 하나 어머님한테 전화하고 그랬더랬다. 그러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버리던가, 굳이 하연 누나한테 연락해서 돌려주던가 네 마음대로 해라."

한바탕 쏟아낸 연후의 눈에 당장이라도 넘칠듯한 눈물이 고였고, 마치 그 순간 그 장소에 앉아있는 것같이 숨을 고르게 쉬지 못하는 그는 그야말로 처량해 보였다. 저런 놈이 그간 어떻게 참고 일을 했을까. 연후는 겨우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나를 노려봤지만, 나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결국 그는 마치 밤샘 근무에 기인했을 피로에 항복하듯이 다시 고개를 젖히고, 바로 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손에 든 딜도를 내려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말을 꺼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연후야. 그런데 여기 뭔가 있다고."

"몰라, 나는. 어차피 어머님도 동네 부끄러워 사건접수도 안 하겠다더라. 부검도 그렇게 못하게 난리를 치더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하기는 하나 본데. 아마 곧 화장할걸. 안 가려고, 나는. 다 잊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연후는 다시 딜도를 노려봤다. 나는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그 역시나 소리 내 말할 수 없는 호기심이 있음을 공감했다. 부엌 서랍에서 쇠젓가락을 하나 꺼내왔다. 끝이 납작한 젓가락이었다. 내가 젓가락을 들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고개를 살짝 멍하니 내가 무얼 하는지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딜도를 손에 들고, 미세한 틈에 젓가락 위쪽 끝을 찔러 넣었다. 약간의 저항이 느껴졌고, 안쪽 어딘가에 걸린 감촉이 있었다. 젓가락을 한편으로 몰아 몇 번을 툭툭 쳤더니 딜도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돌아가며 밀려 나왔다. 반투명한 테이프로 앞뒷면이 감싸진 작은 물건이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평평한 마이크로 에스디카드가 든 보호캡이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고 테이프 위에는 장난스럽게 붙인 듯한 하트 모양의 스티커가 하나 붙어 있었다.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이 영상이나 사진으로 들어있겠거니 싶은 메모리카드와 딜도를 내가 탁자에 내려놓는 모습을 연후는 잠자코 바라만 보고 있었다. 순간 그의 눈이 번뜩였고, 그가 손을 뻗어 메모리카드를 집어 들었다.

"야, 이거 지금 봐봐. 어? 내가 이걸 씻어서 챙겼겠냐 그 경황에? 아니지. 훔치듯이 챙겨 나온 거라고. 괜히 어머님한테 말했다가 욕이나 처먹었지. 그런데……" 그가 보란 듯이 메모리카드를 꼬집어 들고서는 검지와 중지로 문지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미끄럽지가 안잖아!"

내가 손을 뻗자 그가 내 손바닥에 메모리카드를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가 턱짓으로 시킨 대로 나는 그의 동작을 흉내 내며 문질러보았고, 그의 말대로 전혀 미끄럽지 않았다. 고인이 정말로 육중한 기구에 러브젤을 발라 자위를 했다면 아무리 좁은 칼집이라도 그 미끄럽고 끈적한 액체가 스며들지 못할 까닭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연후의 말대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타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목뒤가 오싹했다.

"네 말이 맞아." 억지로 진정하는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그 딜도, 건전지도 들어 있지 않았어."

"그래?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어?"

그는 말문이 막히는 듯 말을 삼켰지만 꽤 오래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가 뜻하려 했던 것을 이해하자마자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입술 안쪽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지만 수치심이 가실리는 없었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의 경멸은 순간이었고, 그 경멸은 결코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내 둘의 표정은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침묵을 이용해 나는 테이프를 벗겨내고 케이스에 든 메모리카드를 꺼냈다. 새끼손가락 손톱만큼이나 작고 얇은, 오랜만에 보는 마이크로 에스디 카드였다. 나는 그걸 다시 탁자에 올려놓았다.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두 눈으로 그 실마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후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딜도에서 무언가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결국, 하연의 것이었다. 연후도 나도 그 사실을 몰랐다. 내가 말했다.

"하연 씨가 전화해서 찾던 게 이건 가봐. 메모리카드 중의 하나야."

"이렇게 작은 게?" 그의 눈썹이 의심으로 꿈틀거렸다.

"흔한 거야. 네 스마트폰에도 들어있을걸."

그는 수긍하는 얼굴로 나를 힐긋 쳐다보고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재조립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입술이 조금 열리다가, 다시 닫혔다. 연후는 말없이 메모리카드를 노려봤다.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연후가 물었다.

"네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물건인데." 내가 받아쳤다.

그러고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결국 자리를 일어섰다. 침실로 가 노트북을 꺼내왔다. 어쨌든 확인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었다. 노트북을 켠 다음 USB형 카드 리더기에 메모리카드를 밀어 넣고 노트북에 연결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연후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등을 소파에 기대 있었고, 눈은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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