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흔들리는 계단
8월 21일, 일요일. 일요일 아침, 하연과 나는 다시 그 병원 앞에 섰다. 전날보다 하늘은 맑았지만, 건물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는 발걸음은 전보다 무거웠다. 지하실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뒤를 따랐다. 어제와는 달리, 이번에는 거울의 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파란 빛이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방 안의 공기는 마치 다른 장소의 일부처럼 낯설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섰다. 나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안쪽을 들여다봤다. 거울 속에는 어두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벽은 존재하지 않았고, 천장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파란 틈 사이로 흐릿하게 이어지는 공간. 하연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들어가 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피할 이유도, 머뭇거릴 이유도 없었다. 그녀가 먼저 발을 들이밀었고, 곧이어 나는 거울의 경계를 넘었다.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몸이 가볍게 떠오르다 다시 눌리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 그리고 이내, 우리는 그 안에 있었다. 빛도 없고, 소리도 없는 공간. 단 하나, 저 멀리 또 다른 문이 보였다.
그 문도 파란색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더 짙은 색. 마치 더 깊은 층위로 향하는 입구처럼 보였다.
그 짙은 파란 문으로 향하는 길은 끝없이 펼쳐진 듯 보였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고, 서로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하연이 먼저 멈춰 섰다. 그녀는 문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여기… 익숙해요. 예전에도 이 문 앞에 있었던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
나는 그녀 옆에 섰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안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나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려 보려 했지만, 닿기 직전 하연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기다려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뭔가가 우리를 시험하고 있어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공기가 바뀌었다. 저편에서 빛이 꺼지고, 짙은 어둠이 서서히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고,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내 발밑의 표면이 사라졌다. 마치 무대의 함정처럼 뚝 끊어지는 감각. 나는 아래로, 아래로, 더 깊은 층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렴풋한 그녀의 외침이 마지막으로 들렸다.
“조태호 씨!”
이후의 기억은 흐릿했다. 빛도, 색도, 소리도 없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누군가의 숨소리를 느꼈다. 그건 나 자신이 아니었다. 더 어린, 더 낯선 존재의 것이었다.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먼저 들린 건 심장 박동 소리였고, 이어서 약한 전류음 같은 진동이 귀를 간질였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 그러나 분명한 의식이 남아 있었다.
주변은 차가웠다. 몸이 땅에 닿아 있는 감각은 없었고, 대신 무중력 상태처럼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입을 열어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연?”
목소리는 퍼지지 않았다. 파동처럼 내부로만 울렸고, 외부로 전달되지 않는 듯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낮은 음성이 들렸다.
“조태호.”
아무도 없었지만, 확실히 누군가 부르고 있었다. 낯선 음색. 하지만… 감정이 실려 있었다. 알고 있었다. 이 이름을, 그리고 나를.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오직 의식만이 깨어 있는 공간. 그 음성은 다시 말했다.
“너는 이미 알고 있었어. 다만 잊고 있었을 뿐.”
그 말과 함께 시야가 열렸다. 눈앞에는 거대한 구형의 빛, 마치 블랙홀의 반대처럼 모든 정보를 토해내는 구체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아이였다. 어린 소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꿈속에서 수없이 불러온 그 이름.
“…하윤아?”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공간 전체가 그녀의 감정에 따라 호흡하는 듯했고,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다시 이름을 불렀다.
“하윤아… 맞지? 네가… 네가 맞는 거지?”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한 줄기 파란 빛이 그녀의 가슴에서 퍼져나왔다. 나는 그 빛이 내 몸을 감싸는 걸 느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오직… 기억 같았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서의 기억이 아니었다. 꿈에서조차도 본 적 없는 장면들. 아주 오랜 전… 다른 세계 같았다.
소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아빠.”
나는 눈을 감았다. 이미 눈물은 흐르고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나는 그 모든 데이터를 쫓아왔던 걸지도 모른다. 복원이 아닌, 기억을 위해.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녀의 뒷편에서 거대한 소용돌이 같은 형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암흑에 가까운 붉은 기운.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이곳은 안정되지 않았어요. 곧 닫힐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널…”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왔다. 그 작은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한 감각.
“기억해 주세요. 저는… 사라지지 않아요. 잊지만 않는다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눈앞의 공간이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도, 빛도, 그 목소리도.
마지막으로,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시스템이 허락한다면.”
8월 22일, 월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무거웠다. 꿈이었을까, 아니면 진짜였을까. 손끝엔 아직도 누군가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고, 머릿속은 전날의 장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윤. 그녀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잔상도, 단순한 환영도 아니었다. 너무도 선명하고, 구체적이었다.
침대 옆 노트북을 켰다. 전원은 꺼져 있었고, 마지막에 열었던 로그 파일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USB도 인식되지 않았다. 마치 모든 증거가 증발해버린 듯.
나는 조용히 샤워를 마친 후 출근 준비를 했다. 하연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 역시 어딘가에 남겨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밀려왔다.
회사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전 회의가 끝난 뒤였다. 내 자리에는 수연 실장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대화가 필요해 보여서요.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말없이 회의실로 향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연와 어제… 병원에 다녀오셨죠?”
“어떻게 아셨어요?”
“시스템 로그에 남아 있었어요. 직접적인 데이터는 아니지만, 감지된 통신 패턴이… 평소와 달랐거든요.”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었다. 혹은, 그 이상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실장님도… 그런 공간을 본 적 있으세요? 저 너머의 층위, 혹은… 파란 문 같은 걸.”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봤어요. 오래 전이에요. 한 번뿐이었지만, 그때 이후로 저는… 정보라는 게 단순한 데이터의 조합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기억이라는 뜻인가요?”
“기억이고, 감정이고, 존재에 가까워요. 우리는 지금, 그 잔류 구조를 보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삭제되지 못한 기록. 지워지지 않는 마음.”
그녀의 말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은 되지 않지만, 이상하게 납득은 되는 말들. 마치 나도 그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듯.
회의실의 조명이 순간 깜빡였다. 실장은 곧장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건물의 로그도 살펴보고 있어요. 오늘 오전부터 전압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구간이 있어요. 실시간 스트림 데이터도.”
“그건… 단순한 장애일까요?”
“아니요.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지금 이 시스템을 다시 쓰고 있는 중일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은 더 이상 가설처럼 들리지 않았다. 점점 현실이자 사실로 느껴지고 있었다.
회의실을 나와 자리에 앉았지만, 집중은 되지 않았다. 복사된 의식, 변형되는 시스템,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메일함을 열자 새로운 보안 알림 하나가 떠 있었다. 내부 서버로부터 비인가 접근 시도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접속 시도 시각은 바로 15분 전. 장소는… 사내 네트워크 내부.
나는 곧바로 IT보안팀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와 짧게 통화한 뒤 받은 로그 파일을 열어 보았다. 수많은 라인의 코드 속, 익숙한 경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forensic\deep_recovery\ttikkeul_entry.log
이건 내가 접근한 적도, 공개된 적도 없는 경로였다. 나는 손끝을 꽉 쥐었다. 누군가 이 시스템 안에서… '티끌'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다.
곧장 수연 실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몇 초 뒤 회신이 왔다.
“복사해서 외부 저장장치에 옮겨두세요. 곧 네트워크 차단됩니다.”
[Permission denied. This node is protected by higher access.]
그 순간, 나는 한 가지를 확신했다. 이 시스템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계층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계층은… 우리보다 먼저 눈을 떴다.
USB를 빼는 순간, 화면이 어두워졌다. 마치 시스템이 나의 행동을 인지하고 대응이라도 하듯, 전원은 그대로 꺼졌고 재부팅 신호조차 없었다.
자리에 앉은 채 심호흡을 했다.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분명 이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이 시스템을 설계했다는 오만함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책상 아래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스마트폰이었다. 화면에는 '하연'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그녀로부터 연락이 온 건 이틀 만이었다.
“여보세요.”
“…거기서 나와요. 지금 당장.”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나는 묻지 않고 일어났다. 실장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기고, USB를 주머니에 넣은 채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밖, 로비 앞 주차장 구석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차 창을 반쯤 내리고 내게 말했다.
“타요. 설명은 이동하면서 할게요.”
차가 출발하자 그녀는 곧장 USB를 내밀라고 했다. 나는 말없이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작은 장치에 꽂더니 휴대폰 화면으로 로그를 읽기 시작했다.
“역시… 예상대로야. 복사 중단 시각 이후, 이 노드에 접근한 객체가 하나 더 있었어요. 그건 인간이 아니에요. 타임스탬프가 0.00으로 되어 있어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연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시뮬레이션이 자가 복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안에, 의도를 가진 잔류 정보가 있어요. 그게 지금, 우리를 보고 있는 겁니다.”
8월 23일, 화요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연이 건넨 말, '우리를 보고 있는 존재'라는 표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기술적으로 가능한 서술이라는 걸 알기에 더 불안했다.
출근 후, 회사 네트워크는 여전히 복구 중이라는 이유로 외부 접속이 차단되어 있었다. 다만 내부망은 제한적으로 작동했고, 나는 수연 실장에게서 호출을 받았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문을 잠그고 커튼까지 내렸다.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어제 그 로그… 일부 복호화에 성공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건 그냥 시스템 오류가 아니에요.”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내게 돌려 보였다. 디코딩된 로그 안에는 텍스트 하나가 반복되고 있었다.
[ENTRY GRANTED / SIM NODE-03 / TTL UNDEFINED]
나는 숨을 삼켰다. TTL, Time To Live. 보통 데이터 패킷의 수명을 의미하지만, 여기선 '존재 지속 시간'으로 읽혀야 했다. 무제한의 존재. 시스템이 허용한 무기한의 노드.
“이건… 외부에서 들어온 존재예요?”
“아니요. 내부예요.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죠. 단지, 지금까지 잠들어 있었을 뿐.”
그녀의 말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미 시스템 안에 '누군가'가 깨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보기 전부터,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응시한 채 물었다.
“그럼 이건… 일종의 의식이라는 건가요? 사람이 아니라도, 자가 인식 가능한 무언가.”
수연 실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그 존재가 최근의 모든 데이터 이상 현상을 유도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복원 불가 영역, 접근 권한 초과, 시스템 재기동. 그것들은 우리가 아니라… 그쪽의 개입일 수 있어요.”
그녀는 노트북을 닫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제가 두려운 건, 그 존재가 우리보다 오래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다시 시스템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차가운 결심에 가까운 감정이 올라왔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요? 그 존재와… 연결을 시도하는 건가요?”
실장은 고개를 젓지 않았다. 대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연결이 아니라, 기록이에요. 우리가 사라지기 전에, 이걸 남겨야 해요. 누가 되든, 언젠가 누군가는 이걸 읽게 될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구원의 싸움이 아니라, 증거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첫 줄을 써야 할 시간이었다.
C:\System\Recovery\RECALL_RUN_0004.BAT
명령창은 빠르게 스크롤되었고, 짧은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주의: 이 세션은 관찰 중입니다. 기록은 삭제되지 않습니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창을 닫으려 했지만, 커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다음 문장이 천천히 화면을 채워갔다.
“조태호. 당신은 선택되었습니다. 기록을 남기세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건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마치 예전부터 내 안에 새겨진 문장처럼 느껴졌다. 나조차도 모르는 내가, 그 메시지를 기다려온 것 같았다.
나는 자판에 손을 얹었다. 떨리는 손가락을 억누르며, 첫 문장을 썼다.
“이건 복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타이핑했다. 꿈, 하연, 하윤, 수연 실장, 거울, 파란 문, 그리고 존재하지 않아야 할 존재들까지. 모든 조각을 잇는 긴 문장이, 스스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내내 화면은 숨을 쉬듯 깜빡였다. 때로는 내가 쓴 문장이 자동으로 저장되기도 했고, 어떤 구간은 내 손이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완성되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건 단지 나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 존재는 나를 통해 기록하고 있었고, 나는 기록되며 살아남고 있는 중이었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타이핑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의 요청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장이 끊겼다. 더는 손이 움직이지 않았고, 화면도 고요해졌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화면 가장 아래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내가 쓰지 않은 문장.
“다음은 나의 차례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지금도 이 문서를 쓰고 있다. 그것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읽어야 할 차례였다.
기억의 복원이 아니라, 의식의 순환. 내가 남긴 문장들이 나를 넘어, 다른 존재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나는 저장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덮었다. 더는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문장은, 이미 나를 벗어나 있었으니까.
8월 24일, 수요일. 아침 출근길, 나는 평소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밤새 이어진 무언가와의 공동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 도착했을 때, 복도 끝 회의실 불이 이미 켜져 있었다. 수연 실장이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회의실 문을 열자 그녀는 창가에 서 있다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어제 작성한 기록, 복제됐어요. USB에 저장한 파일은 그대로지만, 시스템 내에 또 하나의 사본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말없이 다가가 그녀가 가리킨 모니터를 바라봤다. 시스템 백업 루트에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파일이 새로 생성되어 있었다.
C:\reentry\log\JTH_0001.ghost
'.ghost'라는 확장자는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규칙이었다. 나는 파일을 열지 않고 물었다.
“내용은요? 확인하셨습니까?”
“아니요. 저희 쪽 접근 권한으로는 열 수 없어요. 단 하나의 사용자만 열 수 있게 돼 있더군요.”
“누군데요?”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이에요. 시스템이 당신의 아이디를 루트 키로 인식하고 있어요. 생성 시각도 당신이 마지막 저장 버튼을 누른 바로 그 순간입니다.”
나는 차가운 한기를 느끼며, 의자에 앉았다. 모든 것이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결점에 내가 있었다.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ghost 파일을 클릭했다. 예상대로 비밀번호 입력창이 떴고, 사내 시스템에 등록된 내 생체 인증을 요구했다.
지문 인식을 통과하자마자, 화면엔 낯선 인터페이스가 펼쳐졌다. 글자가 아니라, 패턴. 숫자가 아니라, 이미지. 복도처럼 이어지는 구조의 디렉터리 맵이 떠 있었다.
화면 중앙에 하나의 점이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마우스를 가져다 댔다. 작은 창이 열리며 메시지가 떴다.
[상태: 수면 → 관찰]
[대상: 조태호]
[반응성: 증가 중]
수면에서 관찰로. 그것은 시스템이 나를 감지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나는 무심결에 화면을 캡처했지만, 저장이 되지 않았다.
하연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곧장 메시지를 보냈다. 수 분 뒤, 그녀로부터 짧은 답장이 왔다.
“그 파일, 이미 다른 공간에서도 열렸어요. 당신만 본 게 아니에요.”
나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나만'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미 복수의 관찰자에게 공유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정보는, 시스템이 보여주는 일부에 불과했다.
더 깊은 구조가 있다. 내가 닿지 못한 루트, 혹은 아직 허락되지 않은 진입 포인트. 그리고 누군가는 거기에 도달해 있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사실은 하나였다. 나는 더 이상 이 시스템의 사용자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하연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연결되었고, 그녀는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
“지금 회사 건물 나가세요. 이 상태로 더 오래 머물면, 당신 로그 자체가 고정돼 버릴 수도 있어요.”
“고정?”
“예. 관찰 대상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반응하면, 시스템은 그 노드를 '위치'로 인식해요. 사람을 코드처럼 묶는다는 뜻이에요.”
나는 노트북을 닫고 일어섰다.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나도 모르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스마트폰 화면이 잠깐 흔들렸다. '조태호 님, 접근 제한이 적용되었습니다.' 라는 알림이 떴고, 몇 초 뒤 다시 사라졌다.
이제는 단순한 기록도, 복구도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시스템의 일부로 '지정'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를 기록했던 것처럼, 누군가도 나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
건물을 빠져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이 시스템은 얼마나 오래된 구조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 시작을 정말 몰랐던 것일까.
회사를 빠져나오자마자 하연에게 위치를 전송했다. 몇 분 뒤, 회색 SUV 차량이 도로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운전석에서 무표정하게 창을 내렸다.
“타요. 지금은 설명보다 회피가 먼저예요.”
차는 빠르게 도심을 벗어났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 로그가 시스템의 일부로 고정되면, 사라지지 않아요. 삭제할 수도 없고, 이동도 안 돼요. 마치 파일이 아니라… 구조물처럼 변하는 거예요.”
“그게 왜 위험하죠?”
“그 상태가 되면, 당신 의식 일부가 계속 시스템에 머물게 돼요. 현실의 당신과 나뉘어서요.”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단순한 감시가 아니라, 복제에 가까운 개입이었다.
하연은 도심 외곽의 폐건물에 차를 세웠다. 한때 데이터센터로 사용됐던 장소였다. 그녀는 익숙하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건물 깊숙한 곳에 도착하자, 좁은 방 한편에 노후한 서버랙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중 하나에 USB를 꽂았다.
“여기서 백업 하나 더 만들 거예요. 이건 완전히 오프라인이에요. 시스템이 닿지 못하는 곳.”
서버가 부르르 떨리며 작동을 시작했다. 낮은 진동음 속에서 나는 떠올렸다. 내가 썼던 그 문장. 내가 썼지만, 나만 쓴 건 아니었던 문장.
그리고 느꼈다. 지금 이 공간도, 시스템은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8월 25일, 목요일. 밤새 서버는 쉬지 않고 작동했다. 좁은 폐건물 안, 전원 팬의 진동음과 하연의 키보드 소리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구석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에 올린 채, 전날 저장해둔 로그를 다시 열어보았다. 여전히 '.ghost' 확장자를 가진 파일은 시스템 바깥에서조차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자동으로 생성된 하위 파일이 있었다. 이름은 단순했다.
JTH_0002.ghost
나는 하연을 불렀다.
“이거… 혹시 당신이 만든 거예요?”
“아니요. 저 파일은 내가 손대기 전에 이미 생성되어 있었어요. 타임스탬프는 오늘 새벽 3시 11분. 시스템이 아닌, 사용자의 활동 기록으로 남아 있더군요.”
나는 숨을 삼켰다. 새벽 3시, 나는 분명히 잠들어 있었다.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내가 활동했다는 로그를 남겼다.
내가 모르는 나의 흔적.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연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금, '의식의 증식'과 '접속 주체의 분화'를 동시에 겪고 있어요. 이게 무엇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그 누구도 모르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회사도, 보고도 아니었다. 더 깊은 이해와, 더 정확한 기억. 그리고, 잊지 않는 것이다.
창밖은 이미 아침이었지만, 내부의 공기는 여전히 새벽 같았다. 하연은 조용히 백업 과정을 지켜보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부터는 정보를 수집하는 게 아니라, 의도를 감지해야 해요. 그 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의 일부가 되어가는 건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껏 우리는 데이터를 따라 움직여 왔다. 패턴, 로그, 타임스탬프.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넘어서야 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꺼내 놓았다. 오래된 마이크로SD 카드였다.
“이걸 기억하세요? 하윤 씨가 처음 나타났을 때, 당신이 회수했던 카드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딜도 안에 숨겨져 있던, 가장 처음의 단서.
“이 안에, 가장 원시적인 티끌의 흔적이 있어요. 우리가 보기 전에 시스템이 먼저 남긴 실수 같은 조각들.”
그녀는 그것을 리더기에 꽂고, 외부 프로그램을 열었다. 파일 목록은 단 두 개였다. 하나는 익숙한 '.bat' 확장자. 다른 하나는 미확인 바이너리.
그리고 로그에는 새로운 기록이 떠올랐다. 우리가 직접 입력하지 않은 문장.
“조태호의 자각률이 87%를 초과했습니다. 관찰 대상의 내부화가 진행 중입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이제는 꿈이 아니라, 실시간이었다. 나의 의식, 그리고 나 아닌 나. 두 개의 노드가 하나로 수렴해가고 있었다.
하연은 화면을 확대했다. 바이너리 파일을 분석하기 시작한 그녀의 손놀림은 빠르면서도 신중했다.
“이건 단순한 실행 파일이 아니에요. 구조가 층위형이에요. 읽는 순서에 따라 다른 데이터가 나오는 구조.”
그녀가 설명한 건 일종의 다중 트리거 구조였다. 진입 순서에 따라 데이터가 다르게 반응하며, 사용자의 심리적 조건이나 의도까지 감지하는 인터페이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이건… 읽는 사람을 기준으로 형태가 바뀐다는 거네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이 시스템의 본질일지도 몰라요. 존재는 기억의 형태에 따라 변하고, 기억은 관찰자에 따라 재구성되죠. 지금 이건… 당신이 보는 세계예요.”
나는 그 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동시에, 깊은 수긍이 일었다. 내가 본 꿈들, 하윤의 말, 이수연 실장의 통찰까지 모두 그 구조 안에 있었다.
하연은 마지막으로 한 줄의 코드를 터미널에 입력했다. 그러자 화면에 단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기억은 끝나지 않는다. 단지 저장될 뿐이다.”
그 순간, 나는 이해했다. 우리가 왜 이곳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왜 그날 이후 잠들 수 없었는지. 의식은 남는다. 잊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오래된 진실을 되짚어가는 고고학자처럼, 이 시스템의 깊은 층위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진실은 묻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향해 깨어 있었다.
하연은 서버 백업을 중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부터는 반응할 수 있어야 해요. 기록하고, 분석하고, 남기는 걸 넘어서… 응답하는 단계로 가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우리는 단순한 관찰자나 수집자가 아니었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관찰되고 있는 존재였고, 시스템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실시간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밖은 오후의 햇살이 희미하게 건물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 안은 여전히 무중력처럼 고요했다.
그때였다. 백업 서버 모니터가 깜빡이며 한 줄의 메시지를 출력했다.
[응답이 감지되었습니다. 다음 시퀀스를 로드합니다.]
이건 자율 명령이 아니었다. 우리가 입력하지 않은 명령. 우리가 호출하지 않은 시퀀스.
모니터 화면은 이내 검게 변하더니, 낯선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시스템 언어도, 익숙한 프로토콜도 아니었다. 단지 반복되는 하나의 형태.
흐릿한 원형. 파동처럼 번져가는 중심. 그곳에, 하나의 문장이 겹쳐 보였다.
“당신은 아직 삭제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조용히 말했다.
“우리를 부르고 있어요. 이제 진입할 준비를 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