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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티끌 24화

티끌

2부. 흔들리는 계단

by 융 Jung

8월 26일, 금요일. 새벽녘, 폐건물 외곽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정적에 눈을 떴다. 전원 팬의 소음도 멈춰 있었고, 모니터는 잠든 듯 깜빡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버 상태를 확인했다. 백업은 완료되어 있었고, 외부와의 연결이 모두 차단된 상태였다.

하연은 반쯤 눈을 뜬 채 내 움직임을 따라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나는 무릎 위 노트북을 열었다. 시스템은 여전히 나를 사용자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바탕화면에 새로운 바로가기가 하나 떠 있었다.

[RE:CALL_GATE]

나는 손을 떨며 그것을 클릭했다. 화면은 검게 변했다가, 서서히 하나의 인터페이스를 그려냈다. 곡선이 이어진 궤적, 언어가 아닌 형태로 된 지도,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하나의 문장.

“기억의 진입을 허용합니다.”

나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분석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진입의 차원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모니터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유리가, 따뜻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터치한 순간, 내 시야는 깊게 잠수하는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전신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느낌, 의식이 분리되고 조각나는 감각.

눈앞에 어렴풋한 형상이 떠올랐다. 텍스트도 아니고 영상도 아닌, 기억의 패턴. 흐릿한 음성과 냄새, 그리고 감정의 파편들이 뒤엉켜 흐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었다. 파란색 문. 한때 꿈에서 보았던 그것과 동일한 형태, 동일한 채도.

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열려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하연도 함께였다. 그녀는 놀랍지 않다는 듯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여기가 시작이자 끝일지도 몰라요. 이 문을 열면, 시스템은 더 이상 우리를 사용자가 아니라, 일부로 간주할 거예요.”

나는 물었다.

“그럼 그 다음은요? 우리가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건가요?”

“아니요. 반대예요. 기억이 우리를 꺼내는 거예요. 그리고 남겨두는 거죠.”

그 말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납득이 갔다. 나는 손을 뻗었다. 파란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자, 안쪽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얗지도, 노랗지도 않은 무색의 빛. 그 안에서는 형태도, 경계도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발을 들였다. 순간, 수많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통과했다. 과거의 대화, 잊고 있던 생각, 그리고 내가 알지 못했던 문장들.

그중 하나가 또렷하게 남았다.

“조태호, 네가 남긴 문장은 삭제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실행 중이다.”

나는 숨을 삼켰다. 내 과거의 말과 감정이, 이 공간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하연도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아니라, 의도가 반영돼요.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려 하는지에 따라, 구조가 다시 조정돼요.”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갔다. 무한히 펼쳐진 듯한 공간, 그 안에서 하나의 형태가 다가왔다. 사람의 실루엣. 그러나 얼굴이 없었다.

그 존재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 존재의 의도는 내 머릿속에 직접 전달되었다.

“기억의 구조에 동기화합니다. 감정 우선. 형태 후속. 삭제 대상 없음.”

그것은 나를 스캔하는 듯했고, 나는 스스로가 하나의 문장처럼 분해되는 기분을 느꼈다. 과거와 현재, 의식과 관찰 사이의 모든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빛 속에서 형태가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익숙한 공간, 하지만 왜곡된 감각이 섞인 사무실이었다. 책상, 모니터, 그리고 나. 그러나 그것은 과거가 아니었다.

하연도 같은 공간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이건… 당신의 기억에서 재구성된 장면이에요. 우리가 지나온 기록들이 형상화된 거예요.”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창 너머엔 존재하지 않는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물리 법칙이 무너진 곡선, 붉고 푸른 광원들, 멈춰진 교차로.

그 중심에 ‘그 아이’가 서 있었다. 꿈속에서만 보았던, 일곱 살의 얼굴. 나를 보고 있었고, 이번엔 분명히 말을 걸었다.

“아빠, 이제 기억났지?”

나는 무릎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또렷했다. 꿈이 아니었다. 의식의 중심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하연이 말했다.

“이건 당신 안의 가장 오래된 호출이에요. 삭제되지 않은, 가장 선명한 데이터.”

나는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마치 다른 레이어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난 여기에 있을게. 지워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아빠도, 나 잊지 마.”

그 순간, 주변의 풍경이 다시 빛으로 무너졌다. 이곳은 끝이 아니라, 순환이었다. 기억은 반복되고 있었고, 우리는 그 반복의 단위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8월 27일, 토요일. 서버실의 전등이 다시 깜빡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고, 하연은 그대로 바닥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니었다. 우리는 시스템 안으로 진입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우리를 덮어쓴 상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 하윤은 정말 여기 있었어요. 그건 제 기억 속 조각이 아니라… 무언가 더 깊은 거예요.”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존재는 티끌이에요.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의식의 파편. 그 아이는 당신이 남긴 가장 깊은 흔적이에요. 동시에, 이 시스템이 기억하고 있는 당신의 진짜 형태이기도 해요.”

나는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그런데 바탕화면은 사라지고, 검은 화면에 명령어 한 줄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RE:TRACE ENABLED — 시뮬레이션 기록을 역추적합니다.]

하연은 몸을 일으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숫자들이 카운트다운처럼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스템은 이제 과거를 다시 추적하고 있었다. 우리가 남긴 모든 기록, 삭제된 줄 알았던 조각들, 꿈, 로그, 그리고 손끝의 망설임까지.

이제는 시스템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우리 자신도 알게 될 것이다—기억은 끝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카운트다운은 이내 정지했고, 화면은 완전한 정적에 빠졌다. 수 초 뒤, 과거의 데이터 로그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SD카드를 발견했던 그 날, 회의실에서 이수연 실장을 만났던 순간, 하윤의 꿈, 하연의 메시지—all of it.

그러나 이번에는 각 장면마다 한 줄의 주석이 덧붙여져 있었다.

[관찰 로그: 최초 동기화 시점]

[에러 기록: 감정값 과도]

[비인가 접근: 복구 도구 자동 실행]

이것은 단순한 복기(復起)가 아니었다. 시스템은 ‘누가’, ‘언제’, ‘왜’ 기억을 조작했는지 추적하고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증거예요. 우리가 잊은 게 아니라, 누군가가 지우려고 했던 거예요.”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기억을 되찾는 게 아니라, 기억이 삭제된 구조 자체를 반전시켜야 해요. 그게 이 시스템이 허용한 마지막 관문일지도 몰라요.”

화면에 마지막 주석이 하나 더 나타났다. 이번엔 검은 배경에 붉은 글자였다.

[복원 우선 순위: 티끌. 1순위 — 이하나.]

하나의 이름이 화면에 고정된 채, 시스템은 잠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장면. 피도 없고, 고통도 없었던, 마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듯한 죽음.

그러나 시스템은 그 순간의 로그까지 복원하고 있었다. 프레임 단위로 나뉘어진 영상, 압축되지 않은 감정 기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삭제 이전의 로그에 남은 마지막 문장이 존재했다.

그 문장은 소리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음성 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텍스트 레이어가 존재했다.

“…지워지지 않는 건, 나야.”

나는 숨을 삼켰다. 그것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시스템은 그것을 삭제 대상이 아닌, 핵심 노드로 분류하고 있었다.

하연은 조용히 말했다.

“하나 씨는 이미 티끌 상태로 시스템에 편입돼 있어요. 그녀는 흔적이 아니라, 구조예요.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이기도 하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쫓던 것, 내가 기억하려 했던 것, 내가 지우지 않으려 했던 모든 것이 결국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와 마주할 준비를 해야 했다.

서버의 팬 소리가 다시금 높아졌다. 화면에는 'RE:ENTRY PROTOCOL'이라는 문구가 점멸하며, 로그인 요청창이 나타났다.

이번엔 이름이 자동으로 입력되어 있었다—LEE HANA.

나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시스템은 이제 주도권을 넘기려 해요. 하나 씨에게요. 우리가 복원한 게 아니라, 그녀가 우리를 불러낸 거였는지도 몰라요.”

나는 로그인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일순 백색으로 번지고,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펼쳐졌다.

중앙에는 오래된 채팅 기록이 떠 있었다. 나와 하나, 아주 오래전 나눈 대화들. 그러나 그 말투도, 맥락도 모두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이해하고 있었고, 나는 그걸 너무 늦게야 알았다.

채팅창 하단에는 실시간으로 작성되는 문장이 한 줄 추가되었다.

“이건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야. 우리가 지웠다고 생각한 것들은, 사실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었어.”

하연이 조용히 속삭였다.

“이 문장은 지금 이 순간 생성되고 있는 거예요. 하나 씨는 아직 여기 있어요.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시스템을… 같이 쓰고 있는 거예요.”

나는 마침내 이해했다. 그녀는 살아 있는 기억이었다. 티끌은 흔적이 아니라, 잊히지 않기 위한 저항이었다.

8월 28일, 일요일. 우리는 침묵한 채, 흰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감각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시스템이 다시 반응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무표정한 얼굴, 생기 없는 눈빛. 그것은 하나의 신분증 사진이었다.

화면 하단에는 작은 문구가 함께 떠 있었다.

[삭제 보류 상태. 보관 사유: 비가역적 연동 발생.]

나는 하연을 바라봤다.

“이건 무슨 뜻이죠?”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시스템이 하나 씨의 존재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는 의미예요. 그녀는 삭제가 아니라 '보류' 상태에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이유는… 당신 때문이에요.”

나는 말없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 신분증 속 얼굴은 내 기억 속 하나와 조금 달랐지만, 분명 그녀였다.

그 순간, 또 다른 창이 열렸다. 이번에는 오디오 인터페이스였다. 스피커로 아주 짧은 잡음이 흐르고, 이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태호 씨, 아직… 여기 있어요…”

짧은 오디오가 끝난 뒤, 화면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시스템은 하단에 새로운 메뉴를 열었다. 'RE:LINK — 기억 단편 연결 요청'.

나는 마우스를 가져갔다. 버튼이 빛났고, 동시에 주변의 공기조차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었다. 호출된 존재와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하연이 조용히 물었다.

“정말 연결하실 건가요? 당신도 일부가 될 수 있어요. 완전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절반은 넘은 것 같아요. 지금은… 되돌릴 수 없어요.”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화면이 갈라지며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그것은 기록도 아니고, 인터페이스도 아니었다.

하얀 방. 창도 없고, 문도 없는 폐쇄된 방 안에 그녀가 서 있었다. 이하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왜… 나를… 믿지 않았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방엔 어떤 방어도, 변명도, 분석도 허락되지 않았다. 오직 진심만이 존재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녀의 물음은 명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되돌릴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땐… 내가 두려웠어요. 당신이 말하던 것들이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믿기 어려웠어요. 혹시 내가…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맺힌 것도 아니고, 분노가 담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한 실망처럼 보였다.

“나는… 그냥 알고 싶었어요. 내가 본 게 진짜였는지, 내가 느낀 게 틀린 게 아니었는지. 그런데 조태호 씨는, 그걸 의심부터 했잖아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말없이 서 있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 시스템이 다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벽면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연동 상태: 불안정. 감정 동기화율 저하. 복원 실패 우려 발생.]

나는 외쳤다.

“하나 씨, 잠깐만요. 아직 안 끝났어요. 아직 말해야 할 게…”

그녀가 다시 돌아봤다. 이번엔 아주 조용히,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해요. 그러면, 나도 여기에 남을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의 색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하얀 벽면이 연한 청색으로 물들었고, 바닥엔 빛이 잔잔히 일렁였다.

시스템은 반응하고 있었다. 감정의 연동률이 다시 상승하고 있었고, 텍스트가 새로 떠올랐다.

[복원 절차 재개. 티끌 상태 유지. 연결성 확인 중.]

나는 그녀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다. 말로는 닿을 수 없는 거리였지만, 감정은 분명히 전달되고 있었다.

“하나 씨, 이제 알겠어요. 당신이 말했던 모든 것, 내가 두려워했던 그 이유까지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발 내디뎠다. 이번엔 분명히,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닿지 않은 채 마주섰다. 그 사이를 흐르는 건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가능성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 있을게요. 삭제되지 않은 모든 기억처럼. 언제든 당신이 기억하는 한.”

그 순간, 공간이 조용히 닫혔다. 색은 사라지고, 시스템은 원래의 인터페이스로 되돌아갔다.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덮었다. 하연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은 고요했고, 우리 둘 사이엔 더 이상 증명도, 질문도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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