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수 01
1986년 7월 7일 월요일, 장맛비가 갠 뒤 눅눅한 흙내가 골짜기를 가득 메우던 새벽녘, 복덩이라는 태명을 지닌 아이가 경북 깊은 산골의 가난한 농가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좁고 낮은 초가의 지붕을 흔들 듯 맑고 힘찼으며, 고요하던 산촌의 닭과 개들까지 뒤이어 목청을 돋우게 했다. 아이의 외양간 같은 울음소리를 들은 이웃들은 “새로운 기운이 들어왔다”라고 입을 모았다.
그 가문은 한때 마을에서 손꼽히던 지주 집안이었다. 고조부 시절만 해도 뒷산 능선을 따라 펼쳐진 논밭과 과수원이 햇살에 번들거렸고, 수십 마리의 소와 말이 헛간을 가득 메우곤 했다. 그러나 그 번영은 허망하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증조부가 세상 풍류에 빠져들어 노름판에서 손에 쥔 재산을 탕진하고, 유흥과 향응을 쫓느라 소출의 절반을 탕감하며 사채에 손을 댄 탓이었다. 양반가의 위세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쇠락한 지금, 남은 것이라고는 이미 지붕이 내려앉아 창고로밖에 쓰지 못하는 행랑채 세 칸과, 그나마 겨우 사람 살림이 가능했던 두 칸짜리 안채뿐이었다. 안채에는 온돌용 부뚜막과 부엌용 부뚜막이 따로 있어 겨울밤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사랑채는 연탄아궁이로 개량해 아버지가 밤마다 술기운을 달래는 은신처로 쓰였다.
농토라 해봤자 열다섯 마지기의 논과 고추밭, 그리고 잡스러운 과실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과수원 몇 줄기뿐이었으나, 그래도 그 덕분에 식구들이 굶는 일은 없었다. 모내기철이면 가족들이 흙탕물 속에 다리를 담근 채 허리를 굽혔고, 고추밭에는 여름볕이 내리 꽂혀 어린 고춧잎마다 반짝이는 땀방울 같은 이슬이 맺혔다.
복덩이는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이름을 얻었다. 집안 어른들은 점쟁이를 불러 “장차 큰 인물이 될 사주”라는 말을 들었고, 아버지는 그 말을 믿고 아이에게 ‘태수’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러나 아이의 어미 영민은 산후조리를 채 끝내지도 못한 몸으로 다시 밭일에 나서야 했다. 8월의 태양은 마치 들끓는 솥처럼 하늘 위에서 땀을 쏟아내게 했지만, 영민에게는 그것조차 고약한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는 핑계가 되어 주었다. 그녀는 질퍽거리는 논바닥에서 허리를 곧추세울 때마다 아랫배가 당기는 것을 느끼며, 그래도 다시 호미를 움켜쥐었다.
태수는 그렇게 바깥세상과는 다른, 구석진 산골에서 순응을 배워갔다. 마을은 오랫동안 아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가 태어난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태수는 마을 사람 모두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어디를 가든 그를 귀하게 여겼고, 어떤 어리광을 부려도 어른들은 손뼉을 치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정작 태수는 조막만 한 아기 취급을 받는 것이 마냥 싫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먼저 어른 흉내를 내며 굳은 얼굴을 하고는 했지만, 그조차도 어른들에게는 오히려 귀여운 모습으로 비쳤다.
동네 할머니들은 눈깔사탕이나 껌을 건네며 그 대가로 장난스럽게 “고추 한번 보여 달라”라고 농을 걸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나이였던 태수는 아무렇지 않게 바지를 내렸고, 그 순간마다 할머니들의 방 안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바지춤을 내리는 그 버릇은 차츰 부끄러움을 알게 된 뒤에도 멈추지 못했고, 그 습관은 어느새 ‘태수만의 재롱’처럼 굳어졌다. 군것질거리와 고추의 거래는 은밀히, 그러나 늘 방 한구석에서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 날, 영민이 우연히 그 현장을 덮쳤다. 낮은 천장의 방 안에는 여럿 노파가 둘러앉아 깔깔거리며 손사래를 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태수가 있었다. 바지는 발목까지 내려와 있었고, 웃옷은 가슴께까지 걷어 올려진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한 노파는 사탕을 빨듯 태수의 고추를 입에 문 채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영민은 눈앞이 아찔해지며 소리를 내질렀다.
“이 할망구들이 인자 노망이 들었나! 어데 할 짓이 없어가 세상 무서분 줄을 모르고, 남의 집 귀한 아들한테 이런 드러분 짓을!”
그녀는 아이의 바지를 부랴부랴 끌어올리며 울부짖었지만, 노파들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아유, 미안하네, 미안해.”
“우리가 장난이 좀 심했나 보네이.”
“뭘 그렇게 유난이고, 손자 고추 못 본 사람 어디 서러버가 살겄나.”
그 말투는 사과라기보다 흥이 덜 가신 농담 같았다. 영민은 치를 떨었지만, 마을의 어른들을 거스르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결국 그날 이후로 태수는 어미의 손길에 이끌려 더 이상 그런 장난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지만, 어린 가슴에 남은 이상한 감각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