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류연재

비가 두드린

by 준혜이

굵은 빗줄기가 아스팔트 길에 떨어졌다가 팝콘처럼 하얗게 튄다. 발걸음을 멈추고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니까 좋다. 둘째를 아기띠로 안고 분홍색 헬로키티 우산 손잡이를 코트 주머니에 걸고 딸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나는 슬리퍼를 신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장화를 신는 게 아니라고 나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리고 오늘은 비가 내리면 거리를 걸을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 오는 거릴 걸었어, 너와 걷던 그 길을 흥얼거리면서.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내 기억 속 세 번의 소나기가 그치지 않고 같이 내린다. 초등학교, 그 때는 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나의 비 내리는 하교길, 비에 젖은 대통령 후보들의 벽보와 천둥소리에 비명을 지르고 웃던 친구들이 흐릿하게 느껴진다. 얼굴은 남자인데 이름은 여자, 여자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졸업이라 쓰여진 후보의 벽보를 내가 유난히 자주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와 친했던 친구는 어릴 때 밥통에 왼손인지 오른손인지를 데어 그 손을 누구에게도 잘 보여주지 않았는데 그 날은 천둥때문에 당황했는지 상처 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화상자국 위로 비가 묻어 축축하기만 했던 것 같다.


구두를 즐겨신는 친구과 빗길을 함께 걷다가 나는 발로 빗물을 튀겨 친구를 괴롭혔다. 우리가 걷던 길은 내리막 길이었는데 빗물로 장난을 치면서 내려오는 동안 누구도 넘어지지 않은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우리가 넘어진 걸 내가 잊은 거라면 그 날 내가 무척 즐거워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친구보다 빗물에 더 많이 젖었는데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누군가 나로 웃고 소리치고 울기를 매일 바라던 20대였다.


차 전체를 두드리는 비, 빗줄기를 미는 와이퍼 소리와 윤상의 노래는 내가 운전 면허 연습장을 빙빙 돌고 있다는 걸 잊게 했다. 운전 면허를 따고 한국을 떠나면 나는 내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들어봐, 나의 사랑은 함께 숨 쉬는 자유를 외치면서.


딸아이에게 수영복을 입고 밖에 나가서 놀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딸아이가 지금보다 어릴 때는 비가 내려도 놀이터에서 놀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려 나를 곤란하게 하더니. 내리는 빗 속에 춤을 추는 사람은 미친 게 아니라 집이 가까워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코 앞이 집이야 엉망진창이 되어보자. 비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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