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이야기 12화
어제 아내랑 함께 차를 타고 퇴근하면서, 오랜만에 애들 두고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고 해서 동네 선술집을 찾았다. 꼬치 요리를 시키고 반주를 간단히 하며 요즘 근황을 이야기했다. 서로 너무 바쁘다 보니 부부끼리도 가끔 근황 공유를 해야 한다 ㅎ.
요즘 아내 회사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글로벌 교육 기업의 한국 지사장을 맡고 있는 아내는 최근 사내에 팀장들이 각각의 사정으로 부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30명 가까이 되는 지사 직원들이 전부 보고를 지사장인 내 아내에게 직접 하게 되는 상황이 됐다. 일반적이라면 그 상황이 매우 고달팠을 텐데, 아내는 물론 쉽진 않지만 오히려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것들 마음껏 해보며 이끌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시아 본사 및 유럽 본사에서도 이런 유례없는 상황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주고 있다고 했다. 이유는 AI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케이스인 것 같다고 했다. 어설픈 A급 인재 여럿보다 특A급 인재 한 명에 대한 가치가 월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내 아내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외국계 기업, 영어 학원 강사를 거쳐 이 교육업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 다니는 EF는 2013년에 합류해 이제 14년 차가 되었다. 그동안 대리로 시작해서 EF APAC 본사로 승진하고 20년부터 한국 지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내 아내 자랑 맞긴 하는데.. 여기서 하고 싶은 본래 이야기는 그 오랜 시간 동안 EF안의 모든 직군과 환경들을 겪으면서 쌓아 올린 압도적인 Context(조직 전체를 꿰뚫어 보는 깊은 이해와 논리구조)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진정성 있는 Narrative(생생한 진짜 경험)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지난달에 나는 Claude Cowork을 내 아내에게 조금 가르쳐줘 봤다. 당연히 아내는 매우 흡족해하며 잘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다시 사용 후기를 들었는데, 일단 너무 분석을 잘해준다. 그래서 팀장들이 해야 할 일들도 어느 정도 도움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히 보인다고 했다. AI에게 어떤 context를 입히느냐에 따라서 결과값이 많이 달라지는데 지금 본인 회사에 이런 context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단편적인 데이터 인풋값만으로는 진짜 조직의 실무에 도움이 되는 아웃풋값을 만들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 데이터에는 모두 담아내지 못한 그런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와 논리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 그런 것들이 어떻게 나오냐고 물어보니 2가지 정도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우선 본인은 아시아, 유럽 등 전 세계의 윗사람들을 설득해 예산을 따내고 한국의 위치를 넓혀야만 하는 상황에서 "소통 능력"이 정말 중요하다고 했다. 근데 그 소통을 잘하려면 우리 내부와 외부의 논리를 잘 만들어서 설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소통을 잘한다는 것은 Context를 잘 만드는 것"이어서 그 과정들이 각 상황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논리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두 번째는 내가 아내를 놀리다가 나온 이야기인데.. 내 아내가 책을 사놓고 맨날 표지만 열심히 감상하다가 안 읽어서 그럴 거면 책 사지 말라고 뭐라 그랬는데, 그건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본인은 책은 안읽지만(ㅋ) 하루를 매일 바둑처럼 복기한다고 했다. 즉 책은 간접 경험을 위해 필요하지만, 내 하루는 직접 경험이고 이것을 책 읽듯이 하루를 따라가면서 그때 그 상황에서 본인이 한 행동과 사고를 되짚어 본다는 것이다. 듣다 보니 이전 일이 떠올랐는데.. 우리가 김포에 살고 있어서 차가 막히면 강남까지 출퇴근 시간이 2시간도 걸린다. 그래서 내가 사무실을 공덕에서 강남쪽으로 이사왔을때 이제 내가 운전해 줄게 했는데 오히려 안좋아했었다. 그 이유가 본인은 아침에 차안에서 오늘 하루 일어날 일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오늘의 상황을 미리 상상하고 대비한다고 하고 퇴근할 때는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을 "복기" 한다고 했다. 근데 내가 운전하면 이 시간이 방해가 된다나 뭐라나 ㅎ. 이게 내 아내가 책 한 글자도 안 읽어도 이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방법이었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AI 시대에 간접체험보다 더 중요한 게 직접체험이 아닐까 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본인만의 이야기.
아내와의 식사자리가 마무리될 때쯤 홍콩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도 우리가 홍콩에 간 건 정말 잘한 것 같다고.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 이미 out of comfort zone을 경험했다고. 그래서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또래 아이들보다는 적은 것 같다. 근데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아내나 나나 어릴 때 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 이미 나에게 comfort zone 이란건 없구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고도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내 아내는 고3 때 가장 중요한 시기에 미국에 갔다. 부모님도 영어를 못하시니 본인이 집, 가게 계약 및 소통 등 정말 생존을 위한 영어를 터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홀로 한국에 와서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글로벌 기업의 한국 지사장이 되었다. 뭐 어떤 이에게는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릴 순 있어도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을 깬 많은 서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인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이라 본인 PR이나 링크드인에 글 하나 제대로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와 대화를 직접 나눈 사람들이라면, 한국, 홍콩, 스웨덴, 미국 등 EF의 모든 핵심 인물들이 하나같이 내 아내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룹의 회장님까지 아끼는 EF의 특A급 인재가 되어있다.
특A급 인재는 정해진 프레임이 없는 순간에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프레임에서 잘하는 인재들은 어설픈 A급 흉내만 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정해진 틀이라는 건.. 문서를 잘 정리한다거나, 말을 수려하게 잘한다거나, 일을 빠르게 한다거나, 평가를 잘 받는 사람들. 그런데 문서는 남의 논리를 정리하는 것일 수 있고, 말은 소통보다는 학습된 언어를 남들에게 있어 보이게 하는 경우도 많고, 일도 주어진 게 있을 때만 잘하는 사람들이 있고, 평가는 윗사람이 듣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근데 이런 건 사실 AI가 다 대체한다고 본다.
아무도 답을 모르는 상황에.. 전례가 없는 문제에,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어설픈 A급들은 AI에게 물어보거나 주위 눈치를 보겠지만, 진짜 A급들은 자기 경험에서 나온 논리로 판단하고, AI로 실행을 위주로 할 것이라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AI 시대에는 "AI를 잘 쓰는 사람 VS 못쓰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결국 오늘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건 "AI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 VS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한다.
우리 회사도 전례 없는 AI 강풍을 맞으며 프레임을 다시 만들어가고 있다. 난 우리 회사와 팀원들이 진짜 A급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정해져 있지 않은 프레임을 극복한 순간 우리는 특A급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랜만에 AI와의 대화에서 벗어난 내 아내와의 대화가 즐거웠고, 이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채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해서 AI 도움 없이 글을 써봤다. 물론 왠지 이 글을 보면 내 아내는 왜 쟈기 이야기 썼냐고 뭐라 그러겠지만.. 본인 PR 못하는 아내를 위해 대신 했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중간중간 내 컨택스트를 넣어서 AI에게 아웃풋을 몇 개 요구했지만 글 자체는 직접 다 썼다. 11년전에 브런치 시작할때도 적었지만 내 경험담만을 이 브런치에 직접 적기로 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안 그러면 나도 AI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