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적어도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감정을 올바른 의사결정의 적으로 여겨왔다. 과거에 겪었던 몇 가지 사건들 때문인데, 머리로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일이 잘못 돌아가는 경험들을 한 뒤로 '감정이 너무 개입되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여버렸다. 물론 지금도 큰 틀에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공과사를 구분해야 하듯이 무언가 일을 할 때 어디까지가 내 감정이 시키는 일인지,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 일인지를 잘 구분해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오던 나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인간은 감정의 노예다'라는 말처럼, 나 또한 이성정 판단과 대척점에 서있는 내 감정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다만 열심히 묻어두고 있을 뿐이었다. 내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관계를,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항상 싸움을 피해왔고, 사과했으며, 좋은 말들을 하려고 노력했고, 내 서운함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내 이야기를 잘하지 않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게 지난 몇 년간 나를 지켜온 방법이었다.
덕분에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될 수는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화가 나지 않은 척 연기를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감정에 치우치는 건 실질적으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여러 상황에서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들을 많이 없애주었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다른 사람과 다툼이 있을 때도 좋게 좋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화가 나고 서운한 점이 있어도, 그걸 다 쏟아내는 건 결국 관계 개선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누군가와 대판 싸우고 앙숙이 되는 길은 면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남들이 보기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어려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감정 대신 이성을 선택한 나에게 찾아온 또 다른 오류는, 이성적 판단이 역으로 감정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더 맞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내가 원하는 것'은 자꾸만 뒷전이었다. 내가 혼자 판사가 되어 기회를 틈타 올라오는 내 감정들에게 직접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고 나를 채찍질하며 본능에 이끌리는 나를 어리석은 사람 취급했다. (물론 그 시선은 밖으로도 향했다.) 순간의 화, 순간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타이를 때는 참 효과적이었던 이성적 판단이라는 도구가, 그 한계치를 벗어나는 감정을 만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더 괴롭게 했다. 그래서 여러 선택에 있어 더 갈팡질팡했고 그런 내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었다. 나는 억누르지 못하는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이게 맞지'를 연신 외치며 아까운 시간만 허비할 뿐이었다.
이제야 느끼는 건 결국 하나의 진리는 없다는 거다.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성적 판단이던, 감정이던 어느 한 가지에 휘둘릴게 아니라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할 때와 감정에 솔직해야 할 때를 잘 구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간단한 진리지만, 나는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마스터 키'를 찾느라 여태껏 무시하고 있었나 보다. 사람은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 살 수 없다. (그게 더 편할 수는 있겠다만.) 결국 균형을 잘 맞추는 능력을 살면서 시행착오를 통해 키워나가는 거다. 그동안 후회되는 선택을 많이 하겠지만, 어차피 모든 선택이 완벽할 수는 없다. 살아가면서 점점 그 타율을 높여가는 걸 목표로 삼자. (아마 그게 지혜가 아닐까.)
나는 앞으로 더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또 나에게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보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니까 나부터 나를 믿어주자. 내 감정을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자리를 내어주자. 더 이상 감정에 충실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그게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