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가락은 불어 터져 버렸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기록적인 폭우로 서울 바닥은 물바다가 되었다. 엄마, 아빠, 동생한테 연달아 전화가 오고, 재미 삼아 올린 인스타 스토리에는 평소 같지 않은 반응들이 쏟아졌다. 괜찮냐고, 위험하진 않냐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저마다 각각 다른 말들을 보내주었지만 딱히 답장은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그냥 비를 맞으며 내 눈앞에 펼쳐지는 우스우면서도 무서운 광경을 눈에 담고 싶었다. 버스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흙탕물, 아예 신발은 손에 걸치고 거리를 걸어가는 할머니들, 우산을 포기하고 멋쩍은 듯 웃어 보이며 걸어가던 아저씨들, 하나같이 재미있는 광경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상한 순간을 내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사실 나는 평소에 비를 썩 좋아하진 않는다. 젖는 것도 귀찮은 일이며, 오토바이도 탈 수 없고, 기분도 우중충해진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기분을 많이 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날씨가 흐리면 내 기분도 따라간다. 비가 오는 건 지구에겐 꼭 필요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화창한 날씨가 더 필요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기분 좋게 말라있는 내 몸과 스치는 옷의 감촉, 그런 것들이 나에게 더 큰 행복을 준다고 믿었다.
그날도 그랬다. 비가 쏟아지자 나는 물 위에 심긴 잡초마냥 젖어올라갔다. 처음엔 신발 밑창이, 그다음엔 양말이, 마지막엔 무릎 위부터 어깨까지 쭉 쭉 젖어갔다. 어디서 증발해서 나에게 도착한지도 모르는 이 물들이 우울한 감정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몸을 무겁게 하고, 불쾌함을 불러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가 이렇게 억수로 쏟아지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축축해지는 옷은 늘 불쾌했지만, 신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물이 차오른 도로 위를 걷는 나는 워터파크에 놀러 온 사람처럼 선선한 물줄기와 비바람을 데리고 앞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속으로 '이거 참 특별한 경험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애써 피하려 몸을 웅크리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내는 것, 젖어가는 내 상태 대신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내 감정의 차이를 만들었다. 젖지 않게 땅만 보고 걸어가면서도 축축해지는 내 자신에 불쾌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그냥 전부 포기하고 집에 가서 한바탕 시원하게 씻자고 다짐하며 앞을 보고 걷는 것이 한참은 더 재미있는 일인데, 그걸 오랫동안 까먹고 있었다.
지금의 나도 쏟아지는 빗길을 걷고 있지만, 무거워지는 옷 때문에, 우중충해지는 날씨 때문에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재미있는 풍경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 올 땐 그냥 다 포기하고 젖어버리자. 내리는 비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쏟아지는 비바람 속에서 호탕하게 웃으며 걷던 아저씨들처럼 나도 내 즐거움을 찾아서 걸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