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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May 30. 2022

엄마는 죽음으로써 '해방'되었을까?

JTBC 드라마 <나의 해장 일지>  리뷰,  '엄마의 죽음 앞에서'


어떤 죽음은 ‘호상’으로 불린다. 망자가 병상에 오래 누워있지 않고, 가족을 병수발로 고생시키지 않고 떠난 경우를 이를 텐데,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과 무관하지 않다. 호상이든 호상이 아니든, 죽은 자는 이미 세상에 없으니, 호상이란 말은 철저히 산 사람의 입장을 반영한다.  

    

부모님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조문객으로부터 ‘호상’이란 말을 수없이 들었다. 조문객들은 호상이란 말을 축복이라는 말과 등치시키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당황했다. 호상이라고? 우리 엄마(아버지)가 나를 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뭐가 ‘좋은’ 죽음이라는 거지?      


애도 없는 장례문화     


JTBC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의 고모는 시누이인 미정 엄마(이경성)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호상임을 내세우며 망언을 쏟아놓는다. “재벌집 회장도 못하는 게 자다 죽는 거다. 우리 언니가 그 어려운 걸 해내셨네... 내 꿈도 돌연사다.” 이 언어도단은 망자와 망자의 가족을 향한 애도인가, 폭력인가?    

  

다행인지, 나는 부모의 장례를 치르며 애도를 가장한 저 정도의 망언은 듣지 않았지만, 귀 딱지가 앉도록 듣는 ‘호상’이란 소리가 마치 ‘잘 죽었다’는 뜻으로 들려 심장이 후벼 파지는 것 같았다.      


복지가 허술한 사회에서 가난한 노년과 오랜 병상 생활이 사회 전반에 공포로 자리한 현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돌연사”를 호상이라고 내뱉는 몰이성의 조문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호상이라며 울고 웃다 호들갑 떨다, ‘산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집에 넣는 망자와 가까웠던 사람들의 소란한 애달픔보다,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사라지는 조금 멀었을 관계인 조문객의 추모가 더 애도다웠다.    

  

부모의 장례를 치르며 절실히 느낀 점은, 한국 사회엔 애도 문화가 정말 너무나 빈곤하다는 것이다. 형식적인 조문과 조문을 빙자해 이루어지는 무리들의 모임은 조문인지 회식인지 알 수 없이 소란하다.     

 

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조문은 극소수고, 허겁지겁 술과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한쪽 구석에선 부탁하지도 않은 밤샘을 한다고 화투판을 벌이기도 한다. 시절이 무서웠던 코로나시기에 치른 엄마의 장례는 올 사람만 오는 차분한 조문이 이루어져, 화장장 순번이 지체돼 길어진 장례를 그나마 덜 힘들게 치를 수 있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도 힘들었지만 가장 힘든 시간은 화장장에서였다. 상상할 수도 없는 고열의 불길 속으로 엄마가 사라질 때, 저 뜨거운 화로에 엄마를 버린 것 같아 내 몸도 타는 것 같았다. 다 탔음을 고하는 알림이 뜬 후 화로의 문이 열리면 충격적인 광경이 벌어진다. 화장이니까 그러리라 마음을 다잡았어도, 그 광경은 결코 준비되지 않았다. 엄마의 육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덩그마니 남아 있는 엄마의 낡은 뼈들. 저 뼈들이 엄마의 전부라고? 믿을 수 없었다.    

   


쓸어 담긴 엄마의 뼈가 가루가 되어 전해질 때, 분골에 남은 따듯한 온도는 엄마가 뜨거운 불길을 견디고 난 결과겠지만, 이상하게도 엄마의 온기처럼 느껴졌다. 유골함에 담겨서도 오래도록 따뜻했던 엄마와 진짜 이별해야 하는 순간, 엄마의 유골함을 땅 속에 묻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며칠만이라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될까.      


<나의 해방 일지>에서 유골함을 집으로 가져온 미정 남매들은 엄마를 잠시 집에 둔다. 갑자기 돌아가신 탓에 엄마의 유지가 없었으니 유골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웠을 테다. 미정이 엄마의 유골함을 집에 두었다고 하니, 이를 괴이하게 생각하는 직장 동료들의 반응은, 그래도 되냐, 불법 아니냐며 수런댄다. 이에 미정이 “엄마를 어디다 두고 와”라고 태연하게 답한다. 마치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녹았다. 나도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유골을 한동안 집에 두고 싶다는 내 바람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엄연히 세우는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좌초되었다. 급하게 장지를 알아보고 수목장으로 결정해 엄마를 낯선 곳에 묻으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지금 사는 주택이 내 집이었다면 엄마를 내 집 마당에 묻었을 텐데. 엄마를 묻은 그 자리에 나무든 꽃이든 심고 엄마를 보듯 했을 텐데. 미정의 가족이 매일 드나들며 엄마의 유골함을 엄마 보듯 하는 시간은, 갑작스레 엄마를 떠나보낸 가족들에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좀 천천히 엄마와 이별하고 싶은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금속조각으로 남은 엄마     


엄마의 화장 후 창희(이민기)는 화장장의 직원으로부터 금속조각을 건네받는다. 엄마의 몸에서 나온 금속 덩이. 그것은 엄마의 무릎 인공관절 부품이었다. 손 많이 가는 밭농사 지어가며 다섯 식구 밥해 먹이고 집 건사하느라 닳고 닳아 망가진 엄마의 무릎을, 그 고됨과 고통을, 덩그러니 남은 금속 덩이가 웅변하고 있었다.   

  

가족 누구에게도 살가운 애정을 내보일 틈도 없이, 일, 일, 일이 끝도 없이 줄줄이 사탕처럼 엮이는 노동으로 점철된 삶. 그저 일만 하다 죽은 엄마의 고단했던 시간들을 가족들은 사후에야 겨우 짐작할 뿐이다. 농사도 중노동인데, 서른이 넘도록 독립하지 않고 붙어사는 셋이나 되는 성인 자녀를 돌봐야 하는 삶은 무슨 업보일까.      


과로로 등골이 빠져나갔을 엄마가, 무슨 힘으로 자식들의 요구처럼 다정하지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엄마 장례 후 엄마의 가사 노동을 대신하던 기정(이엘)이, “엄마 과로사한 거야”라고 비통하게 깨닫고, 남편 제호(천호진)는 아내가 죽은 후에야 자신의 능력으로 가족을 건사한 게 아니라 실은 아내의 노동에 철저히 빚지고 있었음을 부끄럽게 깨닫는다.      


엄마의 노동과 보살핌 속에 가족이 겨우 유지되었음을 온 식구가 깨달아도,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후회는 언제나 늦다. “이제 더는 못해... 빨간 날이 있길 하나, 365일 매일을 집으로 밭으로 수십 번 들락거리며...” 엄마가 사망하기 전 날 뱉어낸 하소연에는 그의 죽음이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었는지를 번득 되뇌게 한다.   

    

365일 매일을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하느라 엄마는 무엇을 잃어버렸던가. 막내딸이 실연의 상처로 울고 다닌 아픔도, 과년한 큰 딸이 결혼 인연을 찾지 못해 헤매던 방황도, 더는 버틸 수 없는 번아웃으로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운 아들의 고단함도, 일에 치인 엄마는 알지 못했다.  어느 자식이고 애달팠을 마음 한번 알아채지도 쓰다듬어 주지도 못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팠던 “황홀”했던 아이들이 자라 우울한 어른이 될 때까지, 노다지 일만 하느라 자식들의 성장통에 무감했다.      


이를 자각한 엄마는 갑자기 무의미해진 자신의 삶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지 않았겠는가. 할 수 있다면, 노동의 대가로 심은 인공 관절도 빼내 같이 집어던지고서 말이다. 엄마의 육신이 다 타고 남은 기괴한 인공 관절 조각은 뼛조각보다 더 사무치게 엄마의 과로사를 증거하고 있다. 그의 돌연사의 원인은 과로였다.      


창희가 엄마의 인공관절을 소중히 매장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엄마의 노동을 지속시킨, 그러느라 정작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하게 만든 그 금속조각을, 그토록 소중히 애도하는 창희의 마음을 알 것도 같지만, 미안함도 고마움도 실기한 회한은 자기 애도일 뿐이지 않은가.    

  


자신의 근면이 아니라 아내의 헌신과 보살핌으로 집이 굴러갔음을 처절히 깨달았다고 해서, 남편이 아내의 성 역할을 대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제호는 아내를 잃고 속죄의 애도 기간을 가질 거라는 시청자의 착각을 걷어차고, 과로사한 아내의 손 떼가 곳곳에 묻어 있는 집에 새 아내를 들이고 그의 보살핌을 받는다. 이것이 가부장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부부가 살다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여자 배우자의 경우, 대부분 혼자 살다 생을 마감한다. 그토록 오랜 세월 진을 뺀 돌봄에서 겨우 ‘해방’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그 고통에 놓이겠는가.      


반면 남자 배우자는 지체 없이 수발해 줄 여자를 들인다. 나는 이런 케이스를 내 가족에서도 주변에서도 숱하게 봐왔다. 혼자된 남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돌볼 능력이 없다고 기꺼이 믿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사 일을 ‘내가 어떻게 하냐’고 분개한다. 마치 여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법을 배우고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돌봄은 비단 타인을 돌보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돌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자기계발이고 돌봄이다. 이런 능력은 없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지 않았을 뿐이다. 노년 남자의 자기 돌봄은 지금부터라도 익혀야 할 백 세 시대의 필수 기능이다.     

  

집 주변 어딘가에 묻혀, 아이들이 떠난 집에 새 아내와 살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혜숙의 영혼은 어떨까? 차라리 저런 지독한 남편과 노동만 가득 찼던 삶에서 “해방‘되었으니 홀가분할까? 찬바람 부는 마당에 혜숙의 영혼이 쓸쓸히 서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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