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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일희 Feb 18. 2020

책을 읽다 문득, 내가 차별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2019, 창비) 서평 에세이


“차별이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내가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는 간절한 희망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p26)    


“세상 많이 좋아지지 않았나요?” 사람 자체로는 그저 무해하달 수밖에 없는, 사람 좋은 지인 D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이 더 드라마틱하게 매일 벌어지는 세상이 뭐가 좋아졌다는 걸까? 그는 이렇게 좋아진 세상에 사니, 늘 감사하며 산다고 한다. 감사할 게 거의 없을 듯한데 늘 감사해 하며 일하는, 내가 사는 아파트 미화원 아주머니를 마주치면, 가끔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수긋해지지만, D처럼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미안하다’가 아니고 ‘감사하다’고 내세울 때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사는 곳 인근에 P 고등학교가 있다. D의 아이가 다니던 학교로, #스쿨미투가 있었던 학교다. 모 문학상을 수상한 유명짜한 시인 모 씨가 이 학교 교사로 있다, 가르치던 여학생들에게 성폭력을 저질러 공분을 샀던 사건이 있었다. 모 교사는 문단과의 유착으로 학생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대학 진학은 물론이고, 진학 이후도 문단과 연관된 삶을 꾸릴 수밖에 없는 학생들에게 모 교사는 존재 자체로 권력이었다. D는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여학생들 이해가 안 돼요. 왜 그렇게 당하고 있어요? 학교가 거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다른 선택할 수 있잖아요.” D는 성폭력 사건의 전형적 반응인 ‘피해자 탓하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 좋은 무해한 D가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는 순간이다.     


#스쿨 미투를 한 P 고의 여학생들은 자신에게 닥칠 낙인과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증언했을 것이다. 증언 이후 이어진 진실 공방은 이들을 2차 3차 가해로 멍들게 했을 것이다. 이 성폭력 사태에 대한 질문은, ‘어떤 구조가 그들의 성폭력에 공조했는가’와, ‘왜 그들은 성폭력을 당하고도 그 피해를 즉각 폭로하지 못했을까’에 있어야 한다. D의 선량한 차별은, 남성중심주의를 내면화한 자신의 관점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인식의 부재와, 피해의 경중을 구분하여 등급을 매기려 한 데에 기인한다.    



당시 성폭력 피해 학생들은 진학을 위한 나름의 스펙을 쌓느라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그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면, 개인의 정의는 지체될 수밖에 없고, 이는 쉽게 비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명 운동선수인 S가 오랜 성폭력의 피해를 폭로했을 때, 그는 그간 피땀으로 이룬 모든 커리어를 걸어야만 했을 것이다.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을 걸고 #미투를 했던 자체로는 P 고등학교의 여학생들이나 S나 마찬가지다. S의 사례를 들어 즉각 성폭력 피해를 말하지 못했던 여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자, D는 “S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돼요. 근데 그 여학생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잖아요.” 그 여학생들과 S의 성폭력 피해는 어떻게 차별되는 것일까?    


이 경우, D의 차별은 두 가지 층위에서 벌어진다. 하나는 능력(성과)주의에 기반한 차별이다. 다른 하나는 성폭력 피해를 강자의 관점으로 인식한 차별이다. S라는 유명세를 가진 피해자와 딱히 유명하지도 가시적 성과를 내지도 못한 여학생들의 삶을 비교한 D는, 더 지킬 가치가 있는 삶이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삶을 하찮게 취급했다.


성과를 내지 못한 삶도 당사자에겐 소중한 삶이고, 많은 것을 걸고 숨 가쁘게 뛰어온 인생일 터다. 어떤 삶도 그 삶을 걸고 어떤 행위를 해야 할 때는 수많은 주저함을 뒤로하기 마련이다. 시기가 언제이든, 큰 용기를 낸 이들에게 보낼 것은 든든한 지지여야지, 덜 중요한 인생을 가지고 여태껏 뭉개고 있었다는 질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게다 성폭력은 교사한테 체벌 몇 대 당한 폭력을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성인지적 관점에서 성폭력 가해를 보지 않는 사회에서 성폭력을 증언해야 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누구도 쉽게 결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맥락을 모두 소거하면, 성폭력 피해자는 한심한 루저가 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D는 이런 방식으로 구조적 차별의 선봉에 서고 있었다.    


구조맹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구조적 차별을 인지하지만, 자신은 공정하다고 믿는 ‘능력주의의 역설’ 또한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양산한다. 지인 H는 신심이 독실한 종교인이다. 구조의 문제에도 눈뜨고 있어 차별을 성토할 때면 약자의 입장에 서곤 한다. 허나 나름 정의로운 H도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냉혹하다. 그는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게 될 아들의 ‘룸메’가 동성애자만 아니면 된다고 말해 나를 기함시켰다.


기숙사에서 나쁜 혹은 좋은 룸메의 기준은 공동생활에 대한 예의와 배려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H는 동성애자만 아니면 오케이라고 했다. H의 선량한 차별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일까? “성정체성을 떠나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성전환 군인을 강제 전역시킨 군의 태도를 보면, 차별을 구조적으로 생산해내고 공고히 하는 주체가 바로 권력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선량한 차별은 만연해 그 예를 다 거론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없다”는 저자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트에서 마주치는 다른 피부의 이주민들이 아직도 낯설어 다시 쳐다보게 될 때, 나는 내 시선의 폭력을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는 꽤 자주 누군가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 시선을 사용한다.” 모 단체 총회의장에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 회원으로 참석해 힘들게 투표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딱하다고 생각했다. 딱한 사람은 나 자신인데 말이다. 부끄럽게 살지 말자고 눈 부릅뜨고 인권 감수성을 갈고닦는다 노력했어도, 부지불식간에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고 있던 나 또한, 영락없이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모두를 위한 평등’엔 책임이 필요하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 김지혜는 공론장에서 자신이 결정장애가 있다는 말을 한 후, 한 청중에게 질문을 받는다. 그냥 결정을 잘 못한다고 해도 될 말을 왜 굳이 결정‘장애’라고 표현했느냐는 질문에 저자는 우두망찰한다. 무심코 ‘장애’라는 표현을 쓴 자신이 이미, 비장애인인과 장애인을 구별하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정 관념은 자신의 가치체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자기고백인 셈이다.”     


저자는 차별주의의 극단을 차별금지법의 논란에서 찾는다. 성소수자를 빼고 차별금지법을 만들자는 인식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의 평등의 대 원칙을 위반한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자체가 이미 명백한 차별인 것을, 차별을 가리고 차별금지법을 만든다는 건 언어도단 이상의 부정의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매리언 영의 ‘차이의 정치’를 언급하며, “차이를 관계적으로 이해해 상대화하는” 노력이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차별은 단일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차별은 성별, 성정체성, 장애, 인종, 민족, 계급, 학력, 나이 등이 교차되며 벌어진다. 같은 농구 선수라도, 라건아에게 가해진 차별과 박지수에게 가해진 차별은 같지 않다. 라건아에겐 인종과 민족이, 박지수에겐 젠더가 교차하며 차별과 혐오를 발생시키지 않는가. 그러니 모두 반성합시다! 다짐만 하면 차별이 사라질까?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책임을 말한다. (189)     


저자는 차별 없는 사회의 대안으로 조금은 뜬금없을 수 있는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을 제시한다. 이 영화는 소녀들 집단 내의 따돌림 문화가 어떻게 소녀라는 단일해 보이는 집단을 구획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배제를 이기고 연대할 수 있는 희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피구 경기장에서 다수(강자)는 배제당하는 한 소녀를 “금 밟았다”, “너 나가”라며 억압한다. 이때, 소수(약자)인 한 소녀는 용기를 내 이렇게 외친다. “야, 한지아 금 안 밟았어.” 이로서 신경전을 벌이던 약자인 두 소녀의 갈등은 와해된다. 누구와 한 편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편에 서서 목소리로 지지를 표명하고 연대하려는 이 단초야말로 연대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이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전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아래 ‘우리들’과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확정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들’과 ‘그들’이 유동적으로 전복되는 다층적 상황을 전제하고, 교차되는 차별의 지점에서 그 차별들을 알아채고 거두려는 노력이,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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