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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ul 28. 2022

소설 속에서 만난 기지촌 여성

김훈 소설 <저만치 혼자서> (김훈, 2022, 문학동네)


몇 년 전 동두천에 간 적이 있다. ‘기지촌 탐방’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미군의 철수와 함께 기지촌이 사라졌으니, 엄밀히 말하면 기지촌 유적지 탐방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유적지라는 표현에 빈정이 상할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보통 유적지하면 찬란한 문화유산을 떠올릴 테니 말이다. 그러나 유적지가 반드시 승리한 역사만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지촌은 분명 한국 사회의 단면이고, 우리 사회가 반드시 직면하고 기억해야 할 역사적 공간이다. 이런 면에서 지난해 평택에 <기지촌여성평화박물관>이 개관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노력의 결과다.     

 


탐방 목적지는 기지촌 여성의 삶을 짐작할만한 곳이었다. 일명 ‘뺏벌’로 불렸던 옛 기지촌 마을과 많은 기지촌 여성이 죽어 묻힌 상패동 공동묘지 그리고 소요산에 위치한 낙검자 수용소와 미군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기지촌 여성 윤금이 사건이 일어났던 보산동 현장이었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져, 어느 한곳에서도 발길이 쉬 떼어지지 않았다.      

 

이때 기억이 강하게 끌려 나온 건, 김훈의 소설 <저만치 혼자서>를 읽으면서다. 소설에 등장하는 손안나 수녀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낮은 곳으로 임했다고 설정된 곳이 바로 기지촌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무너져가는 자신의 육신을 이끌고 타인의 죽음을 보살”핀 사제와 약자 곁에서 그들의 삶을 부축한 수녀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김훈이 묘사한 기지촌은 강하게 동두천을 연상시켰다. 특히 “치료 감호소”라 쓴 낙검자 수용소와 “감호소 뒷산 땅” 묘지는 상패동 묘지와 매우 흡사해, 마치 그곳으로 끌려 들어가 떠도는 심정이 되었다.  작가가 그곳을 가 보았는지 혹은 취재로 듣게 된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소설의 역사성이나 장소성은 사실과 취재에 기반하더라도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인지라, 딱 그곳일 이유는 없을 터다. 어쨌거나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동두천 기지촌에 있었고, 이는 독자인 내 상상력의 권역일 것이다.   

   


김훈의 소설적 배경이 한국의 대표적 기지촌인 동두천을 떠올린다고, 뭐는 맞고 뭐는 틀렸고를 따져보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기지촌은 소설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느 곳이든, 그의 소설이 기지촌이라는 역사적 공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기반해 독자를 맞이하고 있기에, 보편적 공간으로서의 기지촌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주일 오후 미사 때는 미군에게 몸을 파는 기지촌 여자들이 성당에 와서 무릎 꿇고 합장했다.  성당에 올 때 여자들은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여자들의 얼굴은 화장독이 올라서 시퍼렜고 기미가 번져 있었다...” (P225)     


기지촌에서 사역한 인물 손안나 수녀가 이곳에 임한 시기를 소설은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여든이 넘은 고령임을 감안해 추산해보면 대략 80년대 전후일 것이다. 당시 기지촌 여성들의 삶은 자유롭지 못했다(기지촌 여성의 증언과 당사자가 쓴 책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을 반영). 늘 포주로부터 감시당했다. 어쩌다 목욕탕 한 번을 가더라도 감시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사실상 노예와 다르지 않은 삶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늘어만 가는 빚은 이들의 족쇄였다.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빚을 탕감해야 하는데 불가능했다. 여성들은 알뜰히 착취당했다. 그런 이들에게 주말에 평온히 미사를 보러 다닐 한가로움이 있었을까.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어느 곳이건 따라다녔다. 기지촌의 삶을 정리하고도 기지촌 여성이었음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70, 80년대 미군 남편과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간 ‘전쟁 신부(war bride)'라 불린 기지촌 여성들은 그곳에서도 차별 당했다.      


미국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미국에 사는 한국인에 의해서였다. 한인 교회에서 교인들이 기지촌 여성이었던 ’국제 결혼 여성‘과 함께 예배보기를 거부하자 따로 ’무지개 교회‘를 세운 역사는 이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이국에서도 강하게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교회라고, “화장독이 올라서 시퍼”런 기지촌 여성에게 잠깐의 종교적 평화라도 허용해주었을까. 

     


“...보건소 직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여자들을 검진했다. 직원들은 여자들의 질에서 가검물을 채취해서 균을 배양했다. 균들이 현미경 속에서 꼬물거렸다. 양성반응이 나온 여자들은 치료감호소에 수용되었다. 치료감호소는 시 외곽의 산속에 있었다. 거기에 갇혀서 여자들은 매일 항생제 주사를 맞았고, 사흘에 한 번씩 질 검사를 받았다. ...

손안나 수녀는 교회의 비용으로 사설 학원에 다니면서 조리사 자격증과 간호사자격증을 받았다. 손안나 수녀는 치료감호소에서 여자들의 가검물을 채취하고 주사를 놓고 진료기록부를 작성했고, 구내식당의 취사를 감독했다. 손안나 수녀는 그 여자들 앞에서 수도복을 입지 않았다... 

(퇴소하는) 여자들은 어깨가 다소곳했고 허리가 잘록했고 엉덩이가 푸졌고 긴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흘렀다. 여자들이 걸어갈 때, 몸속에서 리듬이 흘러나와서, 어깨 허리 엉덩이 머리카락이 그 리듬에 실려서 출렁거렸다.” (P226-227)      


한 달에 한 번 이루어졌다는 검진은 어느 시기를 반영한 걸까. 추정되는 시기적 배경으로 미루어 이들은 한 달에 한번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씩 검진을 받았다. 파주에서 필자가 만난 기지촌 여성은 일주일에 두 번 검진 받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파주 선유리에 남아 있는 옛 보건소에서 검진 받았는데, 줄서서 순번을 기다리다 받는 검진에 진저리가 났다고 말했다. 검진은 이들의 삶을 엄격히 통제했다.  

    

검진은 사실상 ‘받았다’가 아니라 ‘당했다’로 말해야 맞다. 검진을 받지 않으면 일할 수 없었고, 검진증 없이 단속에 걸리면 곧장 체포되었다. 단속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는 단속을 ‘토벌’이라는 부르는 말에서도 그 살벌함을 짐작할 수 있다.      


검진으로 감염이 의심되면 이들은 곧장 ‘낙검자 수용소’로 끌려갔다. ‘낙검자 수용소’의 ‘낙검’이란 말 그대로 성병 검진에서 떨어졌다는 뜻이다. 소설에서 ‘치료 감호소’라 부르는 곳이 ‘낙검자 수용소’를 말하는데, 동두천소요산 속에 있는 ‘낙검자 수용소’와 유사했다. 


실재했던 장소고 소요산 자락에 아직도 존재하는데(방치가 맞을 것이다), 동두천 시민단체가 이를 살려 시민의 공간으로 만들자고 시에 제안했지만 응답이 없다고 한다.  강제로 끌려가 제대로 된 치료가 아니라 강제로 페니실린 항생제를 투약한 곳을 ‘치료감호소’라 부르는 것은 정부의 입장일 뿐, 처분 당해야 하는 기지촌 여성들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은 말이다.  


    


파주의 기지촌 여성에게서 ‘낙검’ 당해 수용소에 끌려간 일화를 들은 일이 있다. 그때(70년대)는 파주에도 ‘낙검자 수용소’가 있었는데(이후 동두천으로 일원화되었다), ‘낙검’해 갑자기 끌려가는 바람에 혼자 있을 어린아이 때문에 애면글면 했다고 했다.  젊은 여자들은 운이 나쁘면 기지촌에 산다는 이유로, 기지촌 여성으로 오인되어 끌려가기도 했다. 겨우 겨우 남편이든 아버지이든 신원을 확인하고서야 수용소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간이었다.      


이토록 가공할 공포의 공간을 나서는 여자들의 발걸음이 “리듬”이 실릴 정도로 사뿐할 수 있을까. 물론 심정적으로야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후련하겠지만, 소설이 묘사하는 바는 그들이 당한 폭력을 사건이 아니라 에피소드화한다.      


‘낙검자 수용소’에 관한 증언은 공포와 고통 그 자체다. 춥건 덥건, 날 시멘트 바닥에 달랑 미군 군용 담요 하나 받아, 부작용이 상당한 페니실린을 맞으며 완치될 때까지 살아남아야 했다. 음식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탈출하려다 다치거나 추락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페니실린 쇼크로 죽을 지도 모르는 그곳에서 못 먹고 못자며 겨우 살아남아 벗어나는 상황을 마치 흥에 겨워 나이트클럽을 빠져나오는 여자들인 듯, “어깨가 다소곳했고 허리가 잘록했고 엉덩이가 푸졌고 긴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흘렀”다고 믿어져도 되는 걸까. 소요산의 ‘낙검자 수용소’에 갔을 때, 공포로 터져 나왔을 여자들의 비명과 한숨이 엉겨 붙어 들리는 것 같아 참혹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그들에 대한 어긋나버린 묘사에 크게 상처받고 말았다.        


소설이 묵묵히 사역했다고 믿고 있는 손안나 수녀의 행적도 회의적이다. 미군과 정부가 공조한 강제 수용소에서 손안나 수녀는 간호부 생활을 했다. 기지촌 여성에 대한 강제 검진과 낙검자 수용소의 인권침해는 이들이 국가를 상대로 벌인 손해배상에서 그 위법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런 국가폭력이 자행된 곳에서 손안나 수녀는 페니실린을 놓으며 그들을 관리했다. 그곳의 여자들이 “두려워하거나 혐오할 것”을 걱정해 수도복을 입지 않은 것으로, 번뇌과 연민으로 그들을 대했다는 것으로, 그의 행적이 신의 뜻을 대리했다고 믿어져도 되는 걸까.      



며칠 전 강화 영흥군 근처를 지나다 인근 성당에 들른 적이 있다. 평일이고 미사가 없어서인지 성당은 한적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습한 빛만 스며있는 어둑한 성당 안을 둘러보다, 홀로 조용히 제대를 정리하고 있는 수녀님을 보았다. 열중하나 고요해보였다.      


문득 저리 고요한 신앙을 신전에 두고 때로 싸우는 몸이 되어 민중의 현장에 나타나는 수녀님들이 떠올랐다. 강정에서, 밀양에서, 수요 집회에서, 그들은 약자와 함께 웃고 통곡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이유 없는 고통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라면 자신의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맞서는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다.       

  

“특수업태부들(기지촌 여성들을 칭함)은 약물중독이나 연탄가스 중독, 만취 후 실족추락, 작업 중 심장마비로 죽거나 자살했다. 원인을 모르게 방안에서 혼자 죽어 있는 경우도 있었고, 아무도 모르게 어느 날 사라지는 여자들도 있었다. 자살할 때는 제초제나 살충제 원액을 써서 미수가 없었다. 백합회(기기촌 여성들의 자치조직)는 치료 감호소 뒷산 땅을 구입해서 양지바른 사면에 죽은 특수업태부들의 묘지를 만들었다....”(P227)     


기지촌 여성들은 죽음도 외로웠다. 내가 찾아간 상패동 공동묘지는 돌보는 이가 없는 무연고 묘지라, 묘지라기보다 덤불숲에 가까워 묘지라 부르기도 민망한 지경이었다. 오래전 묻힌 무덤에 비석이 있을 리 만무하고, 경황없이 묻느라 허술히 만들어졌을 봉분은 평지처럼 평평해져 있었다. 탐방 안내인의 설명이 없었다면 무덤이라고 짐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소설 속 ‘백합회’로 언급되는 기지촌 여성들의 상조회는 한동안 서로의 죽음을 돌보았다고 한다. 서로의 죽음을 연민한 그들은 직접 상여를 매고 산에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처럼 값어치 없는 산이나마 구입할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을지는 매우 회의적이다.      



차별과 혐오가 일상이던 그들의 죽음이 상서롭지 않은 경우는 허다했다. 비관 자살도 빈번했다. “원인을 모르게 방안에서 혼자 죽어 있는 경우”, 자살 뿐 아니라 타살도 적지 않았다. 맞아죽거나, 목 졸려 죽거나, 흉기로 난자당해 처참히 살해당한 여자들.      


많은 여자들이 미군에게 혹은 남자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누구도 이들의 죽음을 캐내지 않았다. 죽어서도 배제당한 이들의 죽음이 기괴한 방식으로 각인된 건, 1992년 미군에 의해 피살된 ‘윤금이 살해 사건’이었다. 기지촌 여성 윤금이는 죽어서야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그런데 그가 기억된 방식은 그로테스크하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해당한 여자의 생전 사진과 인적사항이 즉각 신문에 게재됐고, 끔찍하게 살해당한 사체의 사진이 나돌았다. 그가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지자, 사람들은 즉각 민족주의를 끌어들여 그를 ‘양공주’가 아닌 ‘민족의 딸’로 소환했다. 살아서는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던 사람들이 ‘Fucking USA'를 외치며 광분했지만 곧 잊었다.      


그가 살해당한 곳은 동두천 보산동 쪽방촌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다. 지금은 개발로 사라졌지만, 탐방 안내자는 도로 한복판의 한 지점을 밟고 서서, 그가 살았던 곳임을 정확히 알려 주었다. 잠시 묵념했다. 구천을 떠돌지 모를 그의 애달픈 영혼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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