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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Nov 18. 2022

대 격돌 후 남은 한 마디, '다정합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며칠 전 <외계인+1>을 보다 정신이 사나웠다. 630년 전 과거와 현재를 무시로 오가는 데다, 인간의 몸에 빙의한 외계 범죄인이 형상을 수시로 바꿔대는 바람에, 도무지 생각이란 게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사실 정신 사나웠다기보다 정신을 못 차렸다고 하는 게 맞다.     

 

그러다 이 영화 뺨치게 혼을 쏙 빼는 영화를 봤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 ‘모든 것이 모든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인데, 제목이 길어 잘 안 익혀지지만, 일단 영화를 보고 나면 각인된다. 수개의 멀티(다중) 자아가 수 곳의 멀티 공간에서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를 벌이니, 이토록 투명한 제목이 기억에 안 박힐 리 있겠는가.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단 몇 분 만이라도 숨을 돌리고서, ‘그니까 지금 이 영화가 뭐라는 거지?’라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정신 사나움과 창의성은 앞서 내 넋을 나가게 한 <외계인+1>을 능가하며 메시지 또한 우묵하다. 다만 무상한 건, 내게 영원히 ‘예스 마담’인 배우 양자경이 지치고 초라한 아줌마로 분해 스크린에 등장하여 팬심을 쓰리게 했을 뿐이고.     


멀티버스 여기저기에 내가 있다     


에블린(양자경)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영수증은 그가 왜 골머리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지 말해준다. 그저 입에 풀칠하고 사는 코인 세탁소 주인에게 세무국이 생트집을 잡아 고소를 한다니 머리가 쑤실 수밖에. 게다 뭘 해도 마땅치 않아 하는 아버지 수발에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 그리고 불만투성이인 레즈비언 딸까지, 에블린의 복장을 박박 긁는다. 그의 처지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안전핀 뽑힌 폭탄이다.     


그런데 터진 건 폭탄이 아니라 그의 자아였다. 그에게는 우주 빅뱅에 버금가는 자아 대폭발로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수개의 자아를 발견한다. 이 차원 저 차원 다른 역할로 존재하는 평행 우주 속 멀티 자아를 접속하고 그 핵심 원리에 닿자, 광대한 우주 속 티끌도 안 되는 인간으로서 벌인 아등바등 분투가 참으로 눈물겹지 않겠는가.        



아주 대운 든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운이 나쁘면 자주) 에블린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이 온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게 꽉 붙들려 있는 느낌. 그러다 초조와 불안과 무기력과 고독이 켜켜이 엉긴 덩어리가 마침내 화산 대폭발로 분노의 용암을 뿜어내는 순간 말이다.


물론 분노의 용암은 현실에서 여간해선 뿜어지지 않는다. 엄마는 참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엄마인 당신은 ‘엄마가(주부가, 아내가, 딸이) 어떻게 그래’라는 강력한 주문에 걸려 있지 않은가. 분노의 들끓음을 애꿎은 타일 바닥이나 묵은 그릇 따위를 박박 문질러대는 것으로 해소할 뿐이다. 그러니 이런 구질한 방식과 전혀 다른 에블린의 한판 승부가 이토록 통쾌할 수밖에.    

  

나는 시시때때로 현실 이탈을 상상한다     


영화가 평행우주 이론으로 구성한 멀티우주는 우주과학에 과문한 필자로서는 언급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나는 에블린의 공간이동을 강력한 은유로 바라본다. 사면초가에 처한 난국을 타개할 방도로 ‘지금 ~라면’으로 펼치곤 하는 상상, 기도, 소원으로 대체하면서 말이다. 내 멀티버스는 이랬다.    

 

엄마가 노쇠로 몸져누워 운신하지 못할 때, 나는 내 몸이 두 개였으면 하는 상상을 했다. 내 집에 내 식구를 돌보는 내가 있고, 엄마 집엔 엄마만 돌보는 딸이기만 또 다른 내가 있으면 하는. 그럼 멀리 있는 엄마를 돌보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름거리는 내가 사라져버릴 테니 말이다.     

 

딸애가 중2병으로 기세가 등등하던 한동안은 저 아이의 엄마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흠씬 두들겨 패고 회심의 미소를 흘리는 상상을 했다. 이렇게 잠깐 내 몸이 아닌 변태된 어떤 존재에 이입되어 나만의 은밀한 상상 공간에서 나를 짓누르는 그들과 무관한 존재로서 오롯할 수 있지 않은가. 다이내믹 에블린처럼 말이다.      


에블린은 정신없이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정신 바짝 차리고 멀티우주에서 활약한다. 멀티버스 한 차원에서, 지금의 남편인 웨이몬드(키 호이 콴)와 결혼하지 않은 성공한 자신을 보게 된다. 그는 매우 성공한 배우가 되었지만 인연을 맺지 못한 웨이몬드에게 미련이 남는다. 지금의 지질한 남편을 생각하면 저럴 일이 아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은 언제나 애달프기 마련이다.    

 

 

에블린은 웨이몬드와 살기 위해, 혹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미국에 왔다. 하지만 여봐란듯이 아메리칸드림을 성취하지 못한 채 초라해졌다. 당연히 이 군색함을 날릴 한방을 소원하지 않겠는가. 그녀가 이토록 정신 못 차리는 대 혼돈에 빠진 것은 바로 이 한방에 대한 발원에서 비롯했다. “모든 거절과 모든 실망이” 그녀를 “여기로 이끌었”다.     


영화는 로또 같은 금전적 한방 대신, 그녀를 멀티 우주로 데려다 놓았다. 배우, 요리사, 무술가, 성소수자 등 다양한 자아로 존재하는 멀티 공간에서 그녀는 행복할까. 유감스럽지만, 행복하기만 한 자아는 없다. 그 어느 차원의 공간에서도 관계를 초월한 독생자 자아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자식에 관한 한, 잘 풀리지 않는 관계는 그 무엇보다 고심스럽다.      


빌런이 딸이었던 까닭     


이민자의 자식이지만 누구보다 번듯하게 딸을 키우고 싶었던 ‘타이거 맘’ 에블린은 조이가 마땅치 않다. “그녀의 가장 깊은 욕망은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 전부를 (딸에게) 주는 것이었다”(아니 에르노) 그러나 자신의 헌신에 걸맞은 성취로 화답하길 바라는 엄마의 자식은 숨이 막힌다. 조이는 엄마가 싫다. 엄마를 죽이려는 빌런 조부 타파키가 조이의 형상을 한 건, 이들 감정의 날선 대립 각의 반영이다.      


엄마로서야 마땅치 않겠지만, 이민 2세인 조이라고 애로가 없겠는가. 백인 중심 사회의 차이니즈 어메리컨(중국계 미국인) 2세대는 영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네이티브 스피커로 부모의 통역사가 되곤 하더라도, 이는 그저 부모에게만 흡족한 능력일 뿐이다. 피부색이 다른 중국인은 소수인종일 뿐이고 레즈비언인 그의 정체성 또한 가족은 물론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경계에 서있는 조이의 입장은 기실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도피한 엄마 에블린의 미성취 자아와 겹쳐지는 것이다.  자신을 넘어서길 바란 엄마의 소망을 알지만, 엄마 꿈의 대리자로 살기는 싫다. 조이가 빌런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엄마를) 죽이려고 당신을 찾아다닌 게 아니야. 내가 보는 걸 보고, 내가 느끼는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던 거야”라는 토로처럼, 공감받기 위해서였다.      



무한 공간 우주에서 인간은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피력하기 위해, 그러니 한 세상 서로 좀 “다정”하자는 싱거운 한 마디를 던지기 위해, 에블린은 목숨 건 멀티버스 악전고투를 벌인 것이다. 죽비처럼 내리치는 깨달음을 얻었는데, 당한 것 같은 이 허무감은 뭐지?      


영화의 ‘다정하자’는 대의에 찬성이고, “그 어느 우주에 갈 수 있다 해도 난 너와 함께 있겠다”는 에블린의 딸 사랑은 웅숭깊지만, 나는 어쩐지 배우로 성공한 에블린이 현실의 에블린이었으면 하는 미련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한다.      


이래도 지청구 저래도 핀잔먹는 엄마로서 한 세상보다야, 이왕이면 폼 나는 싱글 에블린으로 살아가는 게 번듯하지 않은가. 아, 압니다 알아요. 이러는 거, 내 자아를 투사하고 있다는 거! 어쩌겠습니까, 영화야말로 관객의 멀티버스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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