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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Nov 08. 2019

아이가 잘 되고 못 되는 건 엄마 탓이 아니라니까!!


아이 키우는 게 힘들지 않나요? 혹은 힘들지 않았나요?

저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양육가설]을 꼭 일독하기를 권합니다.


이 책을  읽고 켜켜이 쌓였던 억장을 무너뜨릴 수 있었어요.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게 양육에 대한 과도한 책임을  지고 사는 한국의 엄마들.

왜 그래야 하죠? 


아이의 모든 것이 유년기에 결정된다는 '양육가설'때문에 당치 않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죠. 

그렇다면, 유년기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양육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도 엄마들은 유년기가 지난 후에도 엄청난 압력을 받습니다.


아이의 모든 문제는 엄마에게 귀결되죠.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해도 엄마 탓, 성적이 나빠도 엄마 탓, 몸이 아파도 엄마 탓, 왕따를 당해도 엄마 탓,  뚱뚱해도 말라도 엄마 탓,  욕을 해도 엄마 탓, 비행을 저질러도 엄마 탓, 아이는 부부가 같이 기르는데 어째서 엄마에게만 이 모든 책임이 전가되는 걸까요?      



이 사진은 [케빈에 대하여]의 한 컷이에요. 이 영화 보셨나요?

어떤 평론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엄마의 결정적인 말, "너를 낳기 전이 훨씬 좋았어"가 결국 아들 케빈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고요. 저는 개소리라고 생각해요.


엄마만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도 엄마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적실한 사례를 이 영화가 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케빈이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건 정신적인 문제지, 엄마 잘못이 아니에요. 왜 그랬냐는 엄마의 물음에 케빈이 마지막 대사에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그때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라고요.


케빈 엄마는 미치는 거죠. 그는 잘못한 게 없는데, 모든 걸 다 잃었죠. 그런데도 케빈의 범죄 이후 엄마는 손가락질당하고 테러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죠. 뭘 반성해야 할지 모르면서 반성하면서요. 우습지 않나요? 

이런 거예요. 이게 양육가설이 일상에 출몰하며 엄마들을 한마디로 '조지는' 수단이 되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 거예요. 


학교에서 하는 부모 교육 가봤나요? 가보면 모두 똑같은 말들을 하죠. 엄마가 잘해야 아이가 잘 큰다고. 모성 신화를 끓이고 또 끓여대고 있죠. 4차 혁명 어쩌고 하는 이때에, 때가 어느 때라고  밥상머리 교육 운운하며, 엄마들이 애들을 똑똑히 못 키워 학교에 보내, 교사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종주먹을 대는 거죠?


엄마가 아이의 책임의 전부라면, 학교는 왜 존재하는 거죠?

엄마 탓으로 삐뚤어진 애들은 학교 교육의 힘으로 교화시키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샘 아닌가요?

그렇다면 학교는 필요 없는 기관이란 자백과 다름 아니지 않나요? 

교육의 일선에 있는 분들이 어떻게 자기부정에 가까운 교육 무용론을 부끄러움 없이 설파하는 걸까요.


아이가 잘 돼도 엄마 탓이긴 하죠. 

그래서 이런 엄마들은 살신성인의 지표가 되고 현모의 화신이 되어, 21세기 인공지능이 세계를 뒤엎고 있는 이 시점에, 기존의 가치가 전부 위협받고 있는 이 마당에도, 아직도 '신(新) 사임당'으로 추앙받죠.

이런 엄마들은 '내 아이, 이렇게 좋은 대학 보냈다' 이러며 책을 내고, 학교를 순회하며 '이 못난 것들, 똑바로 해!' 하며, 엄마들 기죽이기에 가세하죠. 


엄마라고 해서, 엄마가 전혀 균질한 집단이 아니잖아요.

아이가 잘 나가야만, 대접을 받잖아요. 발언권이 있잖아요. 아이가 잘 나가지 않으면 엄마는 성원권이 없잖아요. 

이런 방식으로 엄마를 기죽이잖아요. 깨갱할 수밖에요.


이렇다 보니, 아이의 성공은 결국 엄마의 헌신과 능력뿐이라는 강력한  모성 이데올로기를 생산시키고 유통시키는데 가담하게 되는 거죠. 아이의 성공엔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능력'이라는 말을 누구나 무람 없이 재생하면서요.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결국 뭐 하라는 메시지였죠?

봐라, 저런 엄마들이 있는데, 당신은 뭐 하는 거냐. 더 분발하라고!!

기가 막히지 않나요?



이 모든 압력은 실상 만들어진 거잖아요. 

모성은 신화이며, 지금의 형태를 갖춘 가족은 근대의 산물입니다. 유년기, 청소년기라는 생애 주기 또한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었어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인 가정이 탄생하면서,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여성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갇히게 되었죠. 바깥일은 남자들끼리 알아서 잘할 테니, 여성은 가정이나 잘 꾸리고 아이나 잘 키우라고 집구석으로 몰아냈죠, 

그러기 위해선 논리가 필요했겠죠?


양육가설은 여성을 가정의 수호자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여성들에게  꼼작 마라 한 거예요. 아이가 잘못되면 전적으로 엄마의 책임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고 사회가 이를 승인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양육가설은 [양육가설]의 저자 주디스 리치 해리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도전받았고, 상당한 연구가 양육가설의 허구를 뒷받침했지만, 놀랍게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전적으로 엄마의 그림자 노동의 수혜자이니까요.

편안한 삶엔 누군가의 희생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잖아요?

그러니 엄마인 우리들이 정신 차려야 하지 않을까요? 더 이상 속지 말자고요.


아이를 막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낳았으니 잘 키워야죠.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든 삶을 단지 아이만을 위해 던지지는 말자고요. 그리고 혹시 지금 아이 때문에 힘들다면, 더는 자신을 미워하지 말았으면 해요.


모든 걸 잘할 수 있는 엄마는 없어요. 엄마는 전능하지 않아요. 사회가 우리에게 최면을 걸어오면, 우리는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해요. 엄마는 인간일 뿐, 신을 대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신이 보낸 천사도 아니에요. 다만, 내 아이니까, 각자 깜냥껏 잘 키우려 애쓰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이 책 [양육가설]을 꼭!! 읽으세요.

‘양육가설’이라고 해서 양육가설을 옹호하는 책으로 오인하지 마세요. 철저한 비판으로 구성됩니다. 

당신을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히 해방시켜 줄 거예요.

책이 좀 길어요.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보세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훌륭한 저서 [양육가설]의 한 부분을 옮겨볼게요.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해요.


하나, 부모는 자녀의 성격을 좌지우지할 능력이 거의 또는 아예 없다. 자녀가 부모의 성격과 행동을 닮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유전자를 물려받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와 자녀가 같은 문화 또는 같은 하위 문화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둘, 아이는 집 밖에서 또래들과 공유하는 환경 속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회화되고 성격을 형성해 간다.


셋.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마라. 부모는 아이와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에, 부모와 비슷한 행동을 하지만, 이마저도 부모와 함께 있을 때 부모와 연관된 맥락 속에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또한 부모의 영향은 아이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아이는 새로운 행동을 학습하고 주워진 환경에 맞춰가는 데에 유능하다. 


흔히 아이는 백지상태로 태어나며, 그 백지를 채우는 것이 부모, 특히 엄마의 천명이라고들 믿게 만들려 하지만, 전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백지를 아등바등 채우느라 오늘도 애쓰는 당신, 이제는 그만하세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만, 하고 싶은 만큼만 하세요.  '스펙 한 줄 되지 않는 엄마 노릇'을 위해 자신을 다 소진시키는 어리석은 일, 이제 그만하기로 해요. 우리도 살아야 할 소중한 삶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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