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듀>와 <현 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통해 현 앨리스를 성찰한다
그 이름도 생경한, 하지만 내게는 매혹적인 ‘현 앨리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있어 책을 펼쳤다. <카카듀, 경성 제일 끽다점>이다. 앞서 조선 최초의 고공 농성자 강주룡을 소설로 생동감있게 구현한 박서련 작가가 썼다.
소설은 현 앨리스의 전기가 될 고리타분함을 피한다. 그가 상해로 떠나기 전과 후를 짧게 그리고 이후 겪었을 삶의 굽이를 과감히 생략한다. 이어 돌연 부른 배를 한 앨리스를 부산항에 등장시킨다. 이후 현 앨리스는 이 소설의 화자이자 또 다른 주인공인 오촌 아저씨 이경손에게 불쑥 나타나 경성에 끽다점(커피를 팔던 점포로 지금의 카페와 유사하다)을 차리자고 제안한다.
소설은 끽다점이라는 공간을 통해 당시 식민지 청년들의 다사다난한 삶을 조명한다. 이중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김명순이다. 기자이자 소설가이자 배우로 재능이 많았지만 ‘미소지니’로 삶과 명예를 짓밟힌 김명순의 이름이 끽다점을 애호하는 인물로 심상하게 등장한다. ‘비운의 여성’이라는 딱지가 붙기 전 그가 예술을 사랑하는 한 인간이었음을 상기시킨다. ‘한국의 마타하리’로 낙인 당한 현 앨리스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 역시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는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하루를 살아낸 생활인이었을 테니 말이다.
식민지의 혁명가들
혁명가의 강렬한 색깔을 뺀 서사에서 인간 현 앨리스를 충분히 흠향하고 나면, 혁명가였던 그에 관해서도 궁금해진다. 그런데 그에 관한 사료가 매우 드물다. 그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상해 하와이 미국 일본 체코를 떠돌다 최종 도착한 곳이 평양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막대한 노력으로 현 앨리스를 발굴한 정병준 교수의 <현 앨리스와 그의 시대>에 기대, 혁명가이자 딸이자 엄마이자 인간이었던 삶을 조금 짐작해 볼 수 있다.
박병준 교수가 현 앨리스를 탐구하게 된 건 한 장의 사진에서 비롯됐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박헌영, 주세죽, 김단야와 현 앨리스가 같이 찍혀 있는 사진은 근현대사 역사학자의 마음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는 사진 속 ‘3.1 운동의 후예들’의 “열정과 삶에 관한 이야기이자 시대와 역사의 수레바퀴에 으깨진 한 여성의 운명에 관한 보고서”를 <현 앨리스와 그의 시대>에 담았다.
현 앨리스는 1903년 민족주의자이자 목사인 현순의 딸로 하와이에서 태어난다. 현순 부부의 하와이 이주 후 태어난 첫딸이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성장한 그는 이화여고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에서 정준을 만나 결혼한 후 조선에 귀국해 딸을 출산한다.
<카카듀>에서 이경선이 부른 배를 한 현 앨리스를 본 장면이 이때 1923년이었을 것이다. 남편의 변심(전처가 있었고 총독부 군속이 된다)으로 결혼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딸을 두고 하와이로 떠난다. 이때 그는 이미 ‘행동 불령의 여자’로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하와이로 돌아온 현 앨리스는 한인 감리교회 청년회 활동을 열성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폐병을 얻어 1925년까지 치료를 받고 1927년 아들 정 웰링턴을 출산한다.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1935년까지 학업에 진력한다. 다시 하와이로 돌아온 그는 하숙집을 운영해 생활비를 충당하며 미 공산당 하와이 지부 당원으로 노동조합 활동에 투신한다. 그는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하와이 미국 등을 넘나들며 조국 해방에 대한 신념을 실천해 나갔다.
하와이 주둔 미군에서 통번역으로 일하던 현 앨리스는 1945년 해방 이후 미 24군단 정보참모부 산하 민간통검단 군속으로 서울로 전근 발령을 받는다. 한국 입국 후 평소 오빠처럼 따랐던 박헌영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박헌영과 현 앨리스가 스파이 혐의를 받는 단초가 된다.
현 앨리스가 미국 공산당원인 클론스키와 친분이 있고, 그를 통해 박헌영이 클론스키를 접촉해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여론 자료를 수집하고 미국 공산당과 조선 공산당의 연계를 시도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조작된 사실로 박헌영은 수세에 몰리고 현 앨리스는 추방당한다.
박헌영과 현 앨리스의 서울에서의 만남으로 그는 박헌영의 숨은 애인이라는 “통속적 여주인공의 이미지로 소비”되는데, 두 사람은 상해 시절의 가족적 친분으로 꽤 가까웠을 뿐, 연인이었다는 역사적 단서는 어디에도 없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기자였던 박갑동이 1973년 <중앙일보>에 ‘내가 아는 박헌영’을 연재하면서 박헌영과 현 앨리스를 연인 관계로 로맨스화했고, 전노동당 중앙위원 평양시당 위원장이었던 고봉기는 “앨리스는 이강국을 제거하기 위해 김일성이 활용한 미인계였다”며 음해했다. 좌익에 대한 적대감과 ‘미소지니’가 결합해 가공해낸 “저열한 음모론 또는 관음증”은 그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봉쇄시켰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버림받은 혁명가들
추방 이후 현 앨리스는 LA로 이주해 재미 한인 진보운동에 합류한다. 당시 한인 진보진영은 이미 광복군을 지지하는 국민회 흥사단 쪽과 민주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지지하는 의용대 미주 후원회 쪽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승만이 주축이었던 다수인 국민회 측이 독자 정당으로 행세하며 조선의용대 측을 ‘공산당’이라 비판하자, 소수파인 의용대 측은 입지가 좁아졌고 해방 후 입국을 거부당하기에 이른다.
1943년 창간 후 <독립>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무장투쟁을 주장해왔고, 해방 후 미 좌파 언론과 연계해 미 군정에 대한 비판을 꾸준히 전개해왔다. 1946년 1월 이승만이 운산 금광 투자자에게 정치 자금을 받고 광산 채굴권을 넘긴 사실을 폭로한 것이 <독립>이었고, 이 신문의 핵심 구성원이 현 앨리스였다.
여기서 잠깐 현 앨리스의 인터뷰나 기고했던 글을 살펴보자. 1946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조선에도 부녀총동맹을 비롯하여 여러 부녀단체가 있는 모양인데 조선의 여성은 먼저 낡아빠진 인습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그 후에 경제적 정치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자신의 삶을 대변하는듯하다. 1946년 <신천지>에는 ‘미국의 여성’이라는 글을 기고해 미국 여성의 생활상과 정치·사회 참여를 알렸고, 1947년 <독립>에는 ‘녀자의 정치 동등권을 위하여’를 썼다. 그가 조국 해방만큼이나 여성 해방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좁아지는 좌익의 입지는 현 앨리스에게 큰 결정을 하게 만든다. 통일된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더 나은 역할을 하기 원했던 그는 체코를 통해 북으로 간다. 하지만 북은 그가 바란 혁명의 조국이 아니었다. 박헌영이 “미제의 고용 간첩”이 되어 숙청당했듯 그 역시 “미 북파 공작원”으로 사라진다. “이들에게 ‘스파이’라는 오명은 비극을 우화로 만듦으로써 치열했던 삶에 모욕적 기억만을 남겼다. 비극적 진실이 전하지 못한 역사의 가능성과 교훈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현 앨리스의 비극만큼 그의 아들 정 웰링턴도 고단한 삶을 살았다. 모자는 체코에서 짧게 상봉한 것을 끝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땅에서 신산한 죽음을 맞는다. ‘3.1 운동’을 몸에 새기고 조국 해방을 위해 헌신했지만, 북에서는 ‘미제 고용 간첩’이 되고 남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어 죽음에 이른 엄마, 공산주의자에 대한 검열이 극도에 치달았던 시대에 아무 연고없는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다 외롭게 죽어간 아들, 모자의 운명은 격동의 시대적 파고를 넘을 수 없었다.
<카카듀>와 <현 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통해 독자는 억지와 모욕으로 얼룩진 현 앨리스의 삶을 재조명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와 자기 운명의 주인공으로 연속된 불행과 실패를 자신의 의지와 열정으로 극복하고자”했던 한 여성 혁명가의 삶이 재해석되고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