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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May 30. 2024

일본에서 3세대가 지나도록 ‘조선적’을 지키는 이유

<대담집: 재일 디아스포라의 이야기> (김용규, 2024, 소명출판) 

   

며칠 전 ‘재일동포’ 고 최창일씨 재심 사건에 대한 서울고등법원 판결 소식을 들었다. 49년 전인 1974년 간첩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한 판결에 대해 최창일씨의 딸 최지자씨가 재심을 신청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역사의 부정의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50여년 전 조국으로 건너와 꿈을 펼치려던 재일 한국인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간첩으로 기소되어 형이 확정되는 과정에서 중대한 인권 침해가 있었습니다.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가 되어야 할 사법부는 그 임무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고하겠습니다. 피고인은 무죄.”   

  

지금이나마 잘못된 판단에 대한 사과가 있어 다행이지만, 부푼 마음을 안고 조국에 돌아왔던 고인이 겪었을 고통과 피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이런 고통을 겪은 이가 그만이 아니다.



그에 앞서 1971년 유신정권 보안사령부에 체포된 재일조선인 유학생 서승 서준식 형제는 1972년 국가보안법 혐의(간첩)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1978년 7년 만기를 채우고도 ‘사상 전향’ 거부를 이유로 10년 더 감옥에 갇혔다. 어떻게 이런 무도한 일이 있을까 싶지만, 당시 유신정권은 틈만 나면 간첩 조작사건을 터뜨리는 이데올로기 프로파간다로 정권을 유지해 갔다.      


‘재일 한국인’이 포괄하지 못하는 ‘재일조선인’     


위 서울고등법원 판결문의 ‘재일 한국인’이라는 표현은 철저히 한국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해방 후 분단되기 전 조선을 자신의 조국으로 믿거나, 전쟁 후 분단된 상태인 남과 북 중 어느 한 쪽을 조국으로 선택할 수 없는 ‘재일조선인’을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재일 한국인’이나 ‘재일동포’는 아직도 식민과 분단의 자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일조선인’을 탈역사화한 명칭이다.      


이런 맥락을 깨닫게 된 계기는 고 서경식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다(서승 서준식은 그의 형들이다). 그는 2005년부터 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글을 탐독하면서 ‘재일조선인’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 그는 ‘재일동포’라는 말로 수렴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조선’은 국가의 국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반도 출신,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는 의미, 즉 국적이 아니라 민족적 귀속을 나타내는 기호”(<디아스포라 기행> 중)라고 설명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이 모든 ‘재일조선인’을 단일하게 표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40만이 넘는 ‘재일조선인’이 귀화하지 않고 ‘조선적’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그가 말하는 “민족적 귀속”으로서의 ‘조선적’ 정체성이 아니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최근 소명출판이 펴낸 <대담집>에서 그는, ‘재일조선인’이 ‘조선적’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이유를 “반드시 정치적인 행동이 아니어도, 그런 인간적인 저항으로 유도하는 그런 힘이 조금 더 구조적인 것이고... 그중 일부는 아주 인간다운 판단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재일조선인’은 조국애보다 반식민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누구든 조선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재일조선인’을 균질하지 않고 복합적 집단으로 파악해 보려는 <대담집>의 시도는 매우 뜻깊다. ‘재일조선인’ 1세대인 김석범 선생을 필두로 2세대인 서경식 선생, 3세대인 최덕효, 정영환 선생의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역사와 삶에 대한 고민은, 이들을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단순히 민족과 결부시킬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민족과 유리시킬 수도 없는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1세대 김석범 선생의 경우, 스스로를 ‘어린 민족주의자’로 밝힐 만큼 그의 삶을 관통했던 것은 민족의식이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고 전쟁과 분단을 겪었다. 총련계가 다수였던 사회주의 계열 ‘재일조선인’ 친구들이 역사의 파고 속에 침몰하는 걸 목격했고, 이들의 불행이 전쟁과 이데올로기 투쟁 그리고 통일되지 못한 조선에 있다고 생각했다. 부끄럽게 살아남았다는 부채의식으로 “일본 애들이 쓰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4.3을 썼고, <화산도>는 그 의식의 연장적 결과다.     



민족이 중요했던 1세대 ‘재일조선인’과 달리, 2세대 서경식은 1세대의 민족적 애착과는 결이 다른 일본에 사는 소수적 타자로 ‘재일조선인’을 정체한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식민지배 결과로 여기 살고 있고 일본이 식민지배를 청산하지 않는 상황에 살고”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존재를 ‘조선적’으로 밝히고 사는 것만으로도 비폭력 저항을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삶의 기반이 있고 일본어가 모어이지만, “내가 이래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게 되는 자기의식이야말로 2세대에게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키우고 가지게 했다고 설명한다.   

   

3세대 ‘재일조선인’ 최덕효와 정영환은 타자화된 ‘조선적’과 조선인 차별에 갈등하며 ‘재일조선인’으로의 특수성을 자각했다. ‘재일조선인’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을 수 없는 진실은 3세대인 두 사람이 다르게 겪은 삶의 경로와 인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최덕효 선생은 20세까지만 해도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고, 본명을 조선어로 써야 했던 어떤 순간에 닥쳐서야 ‘조선적’에 대한 인식이 벼락처럼 들이쳤다고 회고했다.  

    

일대 혼란을 겪을 당시 서경식 선생을 만나 최덕효 선생의 인생 경로는 완전히 바뀌었다. 추상적이었던 조국이 인식에 들어오자 적극적 연결을 시도하기 위해 한국에서 수학한다. 하지만 한국어 공부와 한국식 생활을 통해서도 온전한 내부자가 될 수 없다는 소외감을 경험하면서 이러한 길항을 통해 ‘재일조선인’ 시각으로 역사를 통합해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된다. 그는 과거의 가해를 완전히 망각한 채로 제국의 유산이었던 ‘재일조선인’을 지운 일본 땅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계승하면서 보편적 디아스포라와 연결점을 찾고자  한다.      


정영환 선생은 고등학교까지 조선인 학교를 다녔다. 조선인 학교를 다닌다는 것만으로 민족의식이 내재되는 것은 아니었고, 일본 사회에서 ‘조선적’으로 차별을 겪으면서 민족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게 됐다. 일본에서는 북조선 여권을 인정하지 않고 한국 정부는 ‘조선적’자에게 여권을 발행하지 않는다. 남과 북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압박하는 상황은 “민족적 기호”로 ‘조선적’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행태다.

      


이것이 그가 “일본에 자신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 귀화하지 않고 조선적으로 살고”있는 까닭이며, 민족주의를 상대화하라고 조언하는 일본 내 탈민족주의자들에게 선뜻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에게 ‘조선적’은 “조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끝나지 않는 고민이며, 반일 민족주의에 반대하면서 어떻게 단힌 민족을 넘어서는 민족 개념을 확립할 것인가에 대한 역사학자로서의 소명이기도 하다.  

    

<대담집>은 ‘재일조선인’에게 민족이 낡은 관념이 될 수 없는 맥락과 네이버 사건처럼 어떤 구실만 있으면 반일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한국 사회의 이중성을 성찰하게 한다.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우리는 까마득히 잊은 ‘조선적’이라는 역사적 자국을 ‘재일조선인’은 아직도 매일 생생히 새기며 살고 있다. 그들에게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것은 비단 일본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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