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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May 01. 2021

<빈센조> VS <열혈사제>

TVN드라마 <빈센조> 리뷰

    


2019년 <열혈사제>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다. 액션 장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고 좋은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사제인 김남길과 비리 검사 이하늬가 엎치락뒤치락하다 마침내 악을 처단하기 위해 공조한다는 스토리가 근간이었다. <열혈사제>는 흔들림 없이 주인공의 캐릭터를 가져가면서 동시에 조연 캐릭터들을 마치 꽃봉오리 터뜨리듯이 만개시켰다. 주연 배우뿐 아니라 조연배우의 물오른 연기는 캐릭터를 극대화시키며 재미를 배가했다.      


게다 검사 이하늬와 형사 금새록의 캐릭터는 흔히 남자 주연 배우의 조력자로 납작하게 묘사되곤 하는 관성을 깨고, 탐욕스런 검사(이하니) 그리고 물불 안 가리며 악당에 맞서는 형사(금새록)라는 여성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살려내는데 성공했다. 


빈틈없는 서사와 균형잡힌 캐릭터 그리고 폭죽 터지듯 터지는 웃음을 던진 <열혈사제>는 보기 드문 코믹 액션 드라마 장르를 성공적으로 제시했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시나리오를 쓴 박재범 작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건 당연할 터, <빈센조>가 그의 작품이라는 걸 알고 무조건 정주행하게 되었다.      



<열혈사제>에는 있고 <빈센조>에는 없는 것     


그런데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일까. 첫 방송부터 본방 사수했지만 <열혈사제>에 비해 뭔가 부족했다. 악당을 쳐부순다는 큰 그림에서 <빈센조>의 서사는 <열혈사제>와 크게 다르지 않고, 화려한 주연 송중기와 전여빈 그리고 다사다난한 캐릭터를 대거 배치한 구성도 <열혈사제>와 상당히 비숫하다. 그러나 <빈센조>는 <열혈사제>처럼 개성 강한 캐릭터와 기발한 설정으로 폭탄처럼 웃음을 터뜨리게 해야 하는 포인트에서 미진함을 보였는데, 마치 재채기가 나올랑 말랑하다 시원스레 터지지 않고 수그러들 때처럼 감질나게 했다.     

 

<열혈사제>의 주인공 김남길와 이하늬가 악당을 쳐부수기 위해 상당히 경합하고 타협하며 공조하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적인 고뇌와 분노가 상당한 공감을 이끌었다면, <빈센조>는 영웅? 마피아 빈센조의 현란한 무공과 신기에 가까운 지략 그리고 무엇보다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는 냉혹함에 철저히 기대 악당과 맞서는 구조다.      


<열혈사제>가 맞서는 악당은, 비록 너무나 염증 나지만,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지 않는 탐욕과 사악함으로 가득한 악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빈센조>의 악당은 섬뜩한 사이코패스로 이런 사이코패스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빈센조와 같은 마피아 냉혈한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듯하다.      



<열혈사제>의 신부 김남길이 악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휘두르는 폭력은, 비록 그가 사제의 신분으로는 부적절한 알코올 의존과 분노 조절 장애를 보이지만, ‘신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시청자를 고민하게 한 반면, <빈센조>에서 재현되는 폭력은 정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쓰레기를 일소하기 위한 도구쯤으로 다루어진다.      


폭력으로 거리낌 없이 악당을 처단하는 빈센조의 싸늘한 대사 “악마가 악마를 몰아낸다”가 함의하듯이, 고민 없이 휘두르는 폭력의 악마성은 언뜻 정의의 얼굴을 한듯하지만,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음을 쉽게 간과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악당을 처단하는 <빈센조>의 폭력은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안기면서도 <열혈사제>가 가진 고뇌하는 정의를 내재하는데 실패한다.      


게다 마침내 빈센조가 겨우 찾게 된 어머니가 살해당하자, 가족을 건드리는 자,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며 잔혹히 복수하는 장면은 어린 아들이 전사가 되어 돌아와 원수를 처단한다는 아주 오래된 가부장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빈센조의 복수가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주는 것은 어쩌면, 현실에서는 빈센조와 같은 복수를 그 누구도 행할 수 없다는 역설을 품고 있다. 그의 복수가 증강현실로 보여 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빈센조가 영웅이 되는 방식     


빈센조는 어릴 때 이탈리아로 입양되었다. 이 과정은 매우 부정의했음에도, 그가 번듯한? 마피아가 되어 돌아왔다는 설정은 시청자로 하여금 입양아의 출세에 만족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공했다는 자기계발의 환상이 소수 성공한 입양 어른의 표상으로 다수 버려진 입양아의 불행을 지우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보호 기관에 잠깐 이이를 맡겼다 다시 찾으러 간 엄마는 보호기관과 입양기관이 공모해 외국으로 불법적으로 빼돌린 아이를 다시 찾을 길이 없었다. 자식을 잃은 엄마의 극한의 고통은 성공한 입양인이라는 허울로 절대 등가가 될 수 없음에도, 드라마는 성공했으니 됐다며 툭툭 손을 털고 있는 인상을 준다. 

     


잘못한 것도 없이 평생 아들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죄책감으로 아들을 만나고도 아들이라 부르지 못하는 어머니의 한은, 빈센조가 영웅으로 금의환향한 성공 앞에 참으로 별것 아닌 고통이 되어버린다. 성공한데다 신공에 가까운 무력으로 어머니의 복수를 치른 빈센조의 위상은, 그를 버리게 한 조국을 드잡이하는 대신, 악당을 죽여도 되는 살인 면허로 되돌려 받은 듯하다.      


<빈센조>의 미진함은 주인공 홍차영(전여빈)에게서도 발견된다. <열혈사제>에서 이하늬가 오만방자하고 속물인 검사 역을 거침없이 해냈던 것처럼, 전여빈 역시 이에 견줄만한 캐릭터를 예상시키며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며 아버지의 삶을 거부하는 강한 인상을 던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홍차영은 맥없이 착한 아버지의 딸로 회귀한다.      


마치 성공을 좇는 여성 변호사가 타락한 딸의 표상이기라로 하다는 듯, 돌연 아버지처럼 인권 변호사로 개과천선하는 그의 변신은, 빈센조의 아들 됨처럼 딸 됨으로 하나 되는 가족주의의 강하게 환기시킨다. 또한 아버지의 복수를 행함에 있어 자신의 방식대로 빈센조와 공조하며 악에 대응하기보다는 빈센조의 손을 빌어 아버지의 피를 닦게 하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무엇보다 <빈센조>가 길을 잃었다는 실망을 강하게 가지게 하는 것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과도하게 드러내는 브로맨스에 있다. 금가 프라자의 모든 상인이 빈센조의 영웅성에 무릎을 꿇고 그를 숭배하기에 이른 것은 물론, 남성 캐릭터들, 상인 토토(김형묵), 사무장 남주성(윤병희), 국정원 요원 안기석(임철수) 그리고 마침내 바벨 그룹의 부사장 장한서(곽동연)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마치 일편단심의 메모리 칩을 심기라도 한 듯, 빈센조를 향한 뜨거운 열망과 동경으로 그의 옆에 있게만 해준다면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 속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국가 안보의 일선에 있는 국정원 요원이 마피아에게 반해 그를 위해 정보를 공유하고 작전을 수행한다는 비윤리적인 설정은 불편함을 넘어 위태롭기 이를 데 없다. 또한 빈센조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았던 철거업자 건달이 빈센조를 흠모하며, “형이라고 한 번만 불러주면 안될까”라는 구애에선 이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를 의심하게 한다. 이들 브로맨스의 초절정은 바벨그룹 부사장 장한서의 빈센조를 향한 뜨거운 팬심에서 극치에 이른다.      



장한서에게 바벨그룹을 무너뜨리게 하려는 빈센조는 원수와 다름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법에 걸린 듯이 빈센조에게 끌린다. 빈센조가 “형 같아서” 무장해제되어, “빈형”이라 부르며 졸졸 쫓아다니는 장한서의 어린 사내애 같은 지질함엔 그의 깊은 상처(어머니가 다른 형제인 장준우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는다)가 작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는 빈센조의 영웅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과한 몰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처럼 흠모하는 빈센조의 영웅 됨은 이토록 무조건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일까? 빈센조가 마피아면서 변호사라는 신분은 자칫 주먹만 쓰는 무도한 무뢰한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법의 정의를 좇는 캐릭터는 전혀 아니며, 그의 한국행 또한 주인 없는 돈이 된 수십조에 달하는 금괴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를 흠모하여 선망하여 마지않는 마피아라는 위치 또한, 따지고 보면 기껏 해봐야 이탈리아 로컬 조직폭력배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를 마치 위대한 정의의 수호자인 양 떠받든다. 남성 등장인물들의 마피아 사랑은 과도한 집착을 보이며, 그 옛날 갱스터 영화 <대부>의 알 카포네를 빈번히 소환시키며, 빈센조를 그의 자리에 앉힌다.      

마피아는 아무리 좋게 평가한다 해도 결국 조직폭력배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아이리시 맨>은 범죄 조직을 위해 가까운 친구와 가족마저 죽여야 했던 조직원 프랭크의 고뇌를 보여주는데, 이는 폭력 조직의 남자다움이란 것이 그토록 의리 있는 무엇이 결코 아니며, 그의 내면화된 폭력성이 가족에게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겼는가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드라마 <빈센조>는 빈센조라는 초현실적인 영웅을 만들어 약자들 간의 연대를 보여주려는 듯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그 속내는, 힘(무력, 재력)에 근거해 서열이 정해지고 이렇게 한번 정해진 서열은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공고히 수호된다는 남성중심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이쯤에서 묻고 싶은 것은, 드라마 <빈센조>가 애초 브로맨스를 작정하고 이토록 민망한 서사를 견인했는가다. 16회로 예정되어 있던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에 기대 20회로 연장되면서, 애초 의도했던 악당에 맞서는 정의(폭력)란 주제가 어느 샌가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악마의 대리자가 피를 뿌리는 폭력과 참 딱하기 그지없는 브로맨스로 잔뜩 채워져, 마치 그럴듯한 재료로 속을 가득 채우긴 했으나 유통기한이 지나 먹을 수 없는 샌드위치처럼, 악취 나는 구태를 탈각하지 못하고 말았다. <빈센조>의 흥행을 과신한 드라마 제작진에게 (막장 드라마가 경악할 시청률을 기록하고는 있지만), 시청자를 단지 잔혹한 복수극의 대리 만족자나 혹은 포장조차 하지 않는 노골적인 브로맨스의 조력자쯤으로 전락시킨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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