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주에 그토록 오고 싶었던 이유
1. 제주 워홀 프로그램의 시작
아침이 밝았다.
예전에 동생과 산방산 근처 숙소에 묵었을 때,
밤새 센서등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한 적이 있다.
귀신이라도 들렸나 싶었지만, 알고 보니 우풍이 심해 예민한 센서등이 바람을 인식한 거라고 했다.
베란다 문도, 창문도 모두 닫혀 있었는데 어떻게 바깥에서 부는 바람을 감지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제주도의 바람은,
그냥 부는 게 아니라 정말 정신이 없을 만큼 분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결국 잠을 잘 못 잤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낯선 곳이라 그런지 시간이 지날수록 감각이 또렷해지고,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바람 소리까지 들려오자 도무지 잠은 오질 않고, 오히려 저만치 달아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깐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
누군가 씻으러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을 설친 사람 특유의 부은 얼굴로 일어나
룸메이트들에게 어젯밤 춥지 않았느냐고,
바람 소리가 심하지 않았느냐고 안부를 대신했다.
역시나 다들 춥다고,
바람 소리가 유난히 잘 들렸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3층 8인실에서 다섯 명이 함께 지내고 있는데,
화장실은 단 하나뿐이다.
전날 저녁에는 다들 적당한 시간에 씻어서
욕실이 하나뿐이라는 게 크게 불편하지 않았지만,
이른 아침에 일어나 씻으려니 순서가 조금씩 밀렸다.
처음엔 아침 식사가 8시부터 가능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7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식사가 가능했다.
그래서 우리 방 사람들은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밥을 먹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기 전, 방 창문 너머로 본 바깥 풍경.
아무리 바람 소리에 잠을 설쳤다고 해도
제주의 이런 풍경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날이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제주라서 좋은 걸.
월요일 아침 메뉴는 호박죽과 배추김치, 열무김치였다.
나는 사실 죽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배가 고파 꼬르륵 소리에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소량만 퍼 담았다.
제주 버킷에서는 삼시세끼를 제공하는 대신 음식을 남기면 안 되기 때문에 각자 먹을 만큼만 덜어야 한다.
죽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로선 남길까 봐 일부러 조금만 담았는데, 먹고 나서 배가 금세 꺼져버려 그 선택을 살짝 후회했다.
밥을 먹고 난 뒤에는 약 20분 정도의 여유가 있어,
룸메 언니와 함께 바로 앞 해변으로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어제 버스를 타고 올 때만 해도 비가 내려 하루 종일 흐렸는데,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갠 하늘이
청명한 가을의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날씨도 제주의 매력이지, 암.
멀리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를
눈에도, 마음에도, 사진첩에도 고이 담으며
부지런히 앞으로 걸었다.
사진만 보면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풍경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 실제로는 강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휘날리고,
어디서 불어온 건지 모를 흙바람이 눈과 코로 들어와
오래 걷기조차 쉽지 않았다.
몸 상태가 괜찮았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조금 더 주변을 돌아보고 싶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터라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나는 언니에게 감기가 더 심해질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며 먼저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언니는 알겠다고 하며,
조금 더 둘러보다 가겠다며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퇴사 후 여러 지역을 돌아보며 지내고 있는 나는
상주, 합천, 순천, 의령 등 다양한 곳을 다녔다.
그저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과 교류하며 잠깐이나마 그들의 삶을 엿보고 지내왔다.
스무 살까지는 도시 사람들은 이름조차 모를 시골에서 자랐고,
그다음엔 대학이 있는 지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회사 때문에 옮긴 지역에서
또 오랜 시간을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어떤 지역을 고를 때마다
그곳이 좋아서라기보다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 선택해왔다.
하지만 지금,
필요가 아닌 ‘좋아서’ 선택한 지역에서 지내보니
각 지역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알게 된다.
아마도 그건,
한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함께 느꼈기 때문이겠지.
9시.
프로그램의 첫 시작을 알리는 OT가 열렸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과는 이미 얼굴도 익히고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었지만,
다른 방 사람들과는 아직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아 모두 초면이었다.
OT에 들어서서야 처음 마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제주 워홀 프로그램은 이름처럼
‘워크’의 요소가 분명했다.
사업 계획서를 작성해야 하고,
팀으로 함께 제출해야 하는 공통 과제도 주어졌다.
그런 과제들을 하다 보면
2주의 시간이 금세 지나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필수 과제로는
팀 프로젝트 결과물을 PPT로 만들어 제출하기,
팀별 릴스 영상을 제작해 올리기,
팀을 소개하는 블로그 콘텐츠를 작성해 업로드하기 등이 있었다.
워홀로 즐기는 로컬 생활은 기수당 30명을 뽑는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름표가 없으면 수 많은 사람의 이름을 다 외우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간단한 프로그램 소개를 들은 뒤엔
버킷이라는 공간을 간단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정문인 줄 알고 들어갔던 문은
정문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제주에 오기 전 찾아본 게시글에서 본 '운동 공간'은
탁 트인 공간에 놓인 운동 기구 몇개라는 것도 알게 된 시간이었다.
다시 코워킹 스페이스로 돌아온 우리는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자기소개 포맷은 이름, 사는 곳, 직업, 프로그램 신청 목적 정도.
간단한 자기소개만 해도 인원이 30명이 넘다보니
시간이 꽤 걸렸고, 자기 소개 이후에는 팀장 이름이 적힌 종이를 뽑아 임의로 팀을 정했다.
팀이 정해진 뒤엔 팀원들끼리 모여 팀원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팀원들과 친해지라고 공통 질문을 적어주셨는데, 그 중 다섯가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나를 표현하는 세가지 단어는?
2. 최근에 처음 도전해본 경험은?
3. 내가 제주에서 꼭 해보고 싶은 한 가지는?
4. 내가 가장 몰입했던 순간은?
5. 나의 MBTI는?
우리는 다섯명이 모여
통성명을 하고 공통 질문과 답변을 부지런히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점심은 12시부터 먹을 수 있었고,
팀원들과의 시간은 11시 30분쯤 끝이 나 잠시 여유가 생겼다.
여유 시간이 생길 때마다
나는 부지런히 눈과 휴대폰에 제주 바다를 담았다.
반짝거리는 윤슬이 나를 홀리는 건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후루룩 흘러가는 것 같았다.
잠깐 남은 시간 동안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우리는 커피를 사러 향했다.
몇 명은 버킷 제주 바로 근처에 있는 '브루'로 갔고,
따뜻한 라떼를 마시고 싶었던 나는 우리팀장인 소희와 함께 '해피족족'으로 향했다.
가장 왼쪽 사진은 해피족족으로 향하는 길에 본 댕댕이.
바람은 불고 해는 따뜻한 날이었는데
나른한 얼굴로 낮잠을 즐기다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귀찮다는 듯
우렁차게 몇 번 짖더니 다시 털썩 누웠다.
여기는 족발을 파는 곳인데,
저녁에는 족발을, 오전에는 카페 메뉴를 판매한다.
나는 ‘땅콩라테’를, 소희는 ‘바닐라라테’를 주문했는데
생각보다 맛이 좋았고, 가격도 합리적이라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버킷 제주에 머무는 동안은
부지런히 바다를 보고, 부지런히 걸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도록
날씨가 좋기를 간절히 바랐다.
물론 제주도는 비가 와도 풍경이 아름답지만,
그래도 바깥을 거닐기엔 역시 맑은 날씨가 더 좋으니까.
12시가 되어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부추전, 오뎅볶음, 수육, 만둣국 등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음식들이었다.
처음에는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량만 퍼왔는데,
먹다 보니 배가 부른 느낌이 전혀 없어 30분쯤 지난 뒤에 조금 더 가져왔다.
*30분이 지난 뒤에 퍼온 이유
– 아직 식사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어,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만 추가로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사진은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던 중,
피아노 선율이 들려와 밖으로 나가 찍은 장면이다.
차 팀장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는데,
그게 또 예상치 못한 조합이라 순간이 인상 깊어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점심을 먹은 뒤 14시부터 다음 일정이 이어졌는데,
바닷가에 나가 사진을 찍으려다
버킷 크루 중 한 명인 래현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대화를 이어갔다.
다양한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어쩜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가끔, 정말 내가 글을 쓰는 게 맞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하곤 한다.
그런데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런 인물을 캐릭터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나는 결국 작가로 살아가게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든다.
14시부터는 다음 일정이 시작됐다.
2주 동안의 팀 공통 루틴과 개인 루틴을 세우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앞으로의 제주 생활이 조금 더 명확해지길,
조금 더 구체적이고 세세해서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겠지.
우리 팀은 공통 루틴으로 ‘매일 감사한 점 세 가지를 찾아 단톡방에 올리기’를 정했고,
나는 개인 루틴으로 ‘끼니 거르지 않기’와 ‘매일 브런치에 글 올리기’를 정했다.
그리고 이 루틴을 바탕으로
2주 뒤, 프로그램이 끝난 나 자신에게 쓰는 편지도 작성했다.
그 편지에는 2주 동안 루틴을 성실히 지켜낸 나에게 전하는 칭찬과 격려의 말들을 가득 담았다.
난 아마도 내 루틴을 잘 지키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그 노력에 따라 잘 지켰을 테니까.
오늘의 공식 프로그램 일정은 모두 끝이 났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젤라또를 먹으러 갔고,
누군가는 본격적인 운동을 하겠다며 어딘가로 떠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코피를 흘리고 몸이 좋지 않았던 나는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 하에
사람들과 떨어져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혼자 바닷가로 나가보았다.
제주의 바다는 어쩜 이렇게 청명한 색일까.
거센 바람에 머리칼이 이리저리 휘날리는 중에도,
그 푸르고 맑은 색을 카메라에 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버킷 제주 근처에는 돌고래 투어 승선장과
가파도, 마라도로 향하는 승선장도 있었다.
주말에는 선택 프로그램이 있었고,
일요일에는 한라산 등반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 한라산을 오르면
2주 차 내내 골골거릴 게 뻔했기에 다른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득, “마라도나 한번 다녀올까?” 하는 마음이 들어 승선장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찍은 제주도스러운 풍경들.
이런 사진들을 홀로 담고 있으니
퇴사 후 제주 한달살기를 위해 이것저것을 찾던 시기가 생각났다.
바닷가를 보며 산책을 하고,
산책을 다녀와서 글을 쓰는 일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는데
그걸 이렇게 이루게 되다니.
역시 뜻이 있는 곳엔 길이 있는 모양이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브런치에 올릴 글을 열심히 쓰다
어젯밤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기 위해 16시 30분쯤 잠에 들었다.
17시 30분엔 퇴실 체크를 해야 하고,
18시엔 저녁을 먹어야 하며,
19시엔 다이소에 다녀올 예정이라 그야말로 에너지 비축용 낮잠이었다.
저녁을 먹기 전, 잠깐의 짬.
코워킹 마루에는 멤버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앉아 함께 대화를 나눌까 하다가,
노을이 예쁘다는 소식을 듣고는
망설임 없이 밖으로 달려가 카메라를 들었다.
다양한 곳에 지내다 보면 카메라를 들고 싶은 순간이 생긴다.
대게 그런 순간에 담는 사진은 아주 찰나라
놓치면 금방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휴대폰을 들고 다녀야만 한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녁 시간.
가을은 덥지 않아 외부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단풍이 곱게 물든다는 매력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해가 너무 빨리 지고 밤이 너무 일찍 찾아온다는 것.
다들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첫째 날이 아쉬웠는지,
다이소에 가기 전 1층에 모여 보드게임을 시작했다.
나는 글을 쓰느라 늦게 내려온 탓에
보드게임 팀에는 합류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게임을 하는 것만 봐도 재미있어 보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다이소와 마트에 도착했다.
다이소에서는 짐을 싸며 미처 챙기지 못했던 물건들을 사느라 분주했고,
마트에서는 각자 마실 술을 고르느라 모두 정신이 없었다.
나는 카스 두 캔만 사서 안주도 없이 가볍게 마시고 푹 자려고 했는데,
그 선택을 몇 시간 뒤에 후회하게 된다.
다른 테이블은 회를 사 와서 먹었는데,
우리 테이블은 정범님이 “안주로 먹으라”며 큰 과자를 사다 주신 덕분에
과자 하나로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21시가 넘어서 시작한 술자리는 23시 전에 싱겁게 끝났고,
아쉬움이 남은 몇 명은 자리를 옮겨
제주 바람이 얼마나 차가운지도 모른 채 바깥에 앉아 조용히 맥주를 더 마셨다.
무슨 이야기가 그토록 재미있었는지,
무엇이 그렇게 나를 들뜨게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전날 밤 잠을 설쳐 피곤했음에도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고 싶을 만큼 즐거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건, 몇 시간 뒤 바로 후회로 돌아왔다.
(숙취가 있었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