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체력이 좋은 것 같기도 나쁜 것 같기도 한 사람
산뜻한 생리통으로 시작하는 아침.
원래는 늦으면 늦었지, 일찍 시작하는 편은 아닌데
제주에 온 뒤로 주기가 바뀐 건지,
면역력이 떨어진 건지 모르겠다.
평소보다 3일이나 빨리 시작됐다.
어쩐지 요 며칠 유난히 피곤하다 했다.
단체 생활 중에 빠지는 걸 정말 싫어하는 편이지만,
6시쯤 룸메들이 일어나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겠다.’
억지로 눈을 떠 이사장님께
몸이 좋지 않아 오전엔 쉬고
특강 시간부터 참여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팀장에게 이야기하고 푹 쉬라는 답이 돌아왔다.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겨우 씻고 1층으로 내려오자,
우리 팀원들이 몸은 괜찮냐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이름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렇게 따뜻한 관심을 건네주는 걸 보니 괜히 마음이 찡했다.
생리통이 심해서 오전에 쉬다 나왔다고 하니,
우리 팀장 소희가 자신이 챙겨온 진통제와 견과류를 건넸다.
이럴 때면 늘 생각한다.
나도 이런 다정함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10시 30분부터 시작된 특강.
나에게 맞는 지원사업을 찾는 방법과 AI를 활용한 사업 계획 작성 방법을 알려주는 시간이었다.
우린 모두 사업계획서를 써야 했는데,
어떤 관점으로 써야 하는지,
뭐가 중요한지에 대한 내용을 알려주셨다.
순천에서는 오롯이 '치유'를 하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의령에서는 축제기획자로서 몸도 마음도 바쁜 한달을 보냈고 청양에서는 '트래킹 투어'답게 많이도 걸었더랬다.
제주에서는 프로그램 이름에 걸맞게
'워홀'이라는 말처럼 '워킹'에 대한 관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과 '홀리데이'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좋다.
돌고래를 보러 갔던 어제는 날이 흐렸는데,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반짝거리는 하늘이 날 반겨준다.
반짝이는 하늘 아래 투명한 바다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절로 풍요로워진다.
팀원들의 배려 덕분에 오전에 푹 쉬며 체력을 회복했더니, 이제야 다시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런 날엔 제주스러움을 잔뜩 즐겨줘야지.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들을
최대한 온전히 느끼고, 마음 깊이 새겨야지.
오늘의 점심은 비엔나소시지, 김, 계란후라이, 미역줄기볶음, 그리고 오징어뭇국까지.
사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메뉴들이지만,
이 반찬들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지 알기에
모든 음식 하나하나가 감사하게 느껴진다.
밥을 푸러 갈 때마다 음식을 해주시는 분이 계신데,
너무 맛있다고, 살이 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면
그분이 환하게 웃어주신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래현 팀장님이 사다주신 겔포스.
챙겨온 양배추 환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속 쓰린 게 가라앉지 않아 겔포스를 먹고 나서야 좀 잠잠해졌다.
14시 10분부터 시작된 올레길 워킹.
삼삼오오 모여서 사진을 찍고 출발했다.
가는 길에 마주한 수많은 풍경들.
누군가에게는 그저 수많은 일상 중 하루일 텐데,
어쩌면 매일 봐서 감흥이 없는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에는 모든 것이 제주스러워서
하나라도 놓치기 아까운 마음으로 눈에 담기 바빴다.
다람쥐를 닮은 다빈이와 함께 걸으며,
“풍경이 예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중간지점.
푸른 하늘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만 같은 풍경들.
산책 러버인 우리 방 지영 언니와 산책 메이트 민선 언니가
저만치 멀리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길래
뭘 보고 있냐고 물었더니,
바다를 옆에서 보면 ‘파도의 옆면’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파도의 옆면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말이었다.
그 표현도, 그 모습도 그제야 처음 인식했다.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건,
그들의 말과 생각을 전해 듣는다는 건
그만큼 내 세상이 넓어지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이렇게 좋은 날
이렇게 좋은 곳에 오다니.
오전까지만 해도 끙끙 앓으며 아파서
트레킹을 못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진통제 두 알을 챙겨먹고 나오길 정말 잘한 것 같다.
안 나왔다면 이런 풍경도 못 보고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못 나눴다는 거잖아.
제주도에 오고 나서
시간의 밀도가 굉장히 촘촘해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시간 가는 게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
이렇게 좋은 시간들이 조금만 덜 빠르게 흐르기를.
트레킹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잠깐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소희와 민석이, 솔휘, 이든 크루님까지 모여서 mz샷도 찍고.
30분 간의 짧은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돌아보는데
아무리 봐도 이번 제주도 날씨 운은 끝내주는 것 같다.
트레킹 하는 날 이렇게 맑은 날이라니.
그덕에 바다도 더 푸르게 보이고 모든 풍경들이 눈이 부시게 반짝거린다.
주변을 돌아보고 있자니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왔던 때가 생각났다.
삼삼오오 모여서 뭐가 예쁜지도 모르고
뭐가 좋은지도 모르고 조잘조잘 이야기만 해댔던 시간들이었는데 (아련)
하지만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사람 사이의 상성이 어디로 흘러가버리는 건 아닌 것 같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끝내주게 예쁜 풍경 앞에서
도대체 할 말이 뭐가 그리 많은지,
끊임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목적지로 향할 때는 온도가 조금 높았다.
땀을 흘리면 바람이 식혀주고, 다시 땀이 흐르면 또 바람이 와 닿았다.
그 반복 속에서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닿았고,
멈춰 서자마자 식은 땀이 몸을 훅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기억하자.
이제부터 2주간의 생활을 무사히 끝내고 싶다면, 더는 아프면 안 된다.
스스로 되뇌이면서 갈 때는 차량에 탑승해서 편하게 숙소로 돌아왔다.
걸어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숙소로 오려면 시간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부지런히 3층으로 올라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걸어서 돌아온 이들이 도착하고
1층에 모여 오늘 트레킹이 어떠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 팀에서 한 명씩만 소감을 이야기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우리 팀에서는 팀장인 소희를 시켰다 (ㅋㅋ)
드디어 저녁!
트레킹을 하면서 반드시 밥을 많이 먹으리라 다짐하지만,
막상 밥을 펴 담을 때면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조금만 퍼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적게 먹어놓고는
남은 긴긴 밤시간 동안 배고파하는 편이다.ㅎ
밥을 먹고 잠깐 쉬는 시간.
창밖으로 분홍빛 노을이 예쁘게 지고 있었다.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숨이 멎을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횟수가 줄어든다고 한다.
제주에 온 이후의 나는,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 행복을 찾으며 지내고 있다.
그 시간 속에서 파랗고 맑은 하늘을 볼 때도,
시시각각 붉어지는 노을을 바라볼 때도,
문득 행복해진다.
오늘도 이어진 술자리.
회와 어묵탕, 과자 등 다양한 안주가 테이블 위에 올랐다.
나도 마실까 싶어 내려왔지만,
속이 쓰려 약까지 먹어놓고 또 마시는 건 아닌 것 같아
결국 단념하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만의 핫플, ‘홍마트’에서 사온 생강차를 마시며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모든 게 감사하게 느껴진다.
적당히 부는 바람,
따뜻한 물 한 잔,
그리고 제주라는 지역이 주는 특별함까지.
이 단순한 조합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충분히 완벽하다.
이번 워홀에서는 팀 루틴을 만들어 매일 실천하고,
그 과정을 증명해야만 한다.
우리 팀은 ‘매일 저녁 감사한 점 세 가지를 찾아 단톡에 올리기’로 정했다.
다른 팀들은 아침 운동을 루틴으로 삼거나
서로를 칭찬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들었는데,
우리는 비교적 조용한 팀이라
각자가 스스로 실천하고 단톡방에 공유하는 방식으로 정했다.
일정을 마치고 피로가 밀려오는 시간에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한 일을 떠올리는 것—
그 자체로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홀로 차를 마시고 있노라니
선택 프로그램인 '탄산 온천'을 다녀온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정말 술을 안 마시려고 했는데..
포비를 닮은 동기랑, 우리 방 연주랑 함께 차를 타고 나가
편의점에서 가볍게 마실 막걸리와 빵을 사왔다.
이틀 동안은 맥주를 마셨으니,
오늘은 막걸리를 마셔도 괜찮겠지.
(…겠냐고.)
술김에 야무지게 찍은 별까지.
3일 연속으로 술을 먹는 건 진짜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