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숙 Jul 26. 2024

양말이 뽀송하지 뭐야

아버지는 가난한 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엄마가 자주 하는 아버지 얘기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절약에 관한 것이 있다.


“작은 아들이라고 숟가락 몽뎅이 하나 받은 거 없이 달랑 이불보따리 메고 서울로 왔어.

아현동에 방을 얻었는데 느이 아버지는 대각선으로 누워야 겨우 다리를 뻗을 수 있었지.”

“에고..”

“공무원 월급이 얼마 되나? 그거 아끼고 안 쓴 거지. 아 그런데 어느 핸가 여름이었는데 고춧가루를 꺼내보니 몽땅 곰팡이가 피었지 뭐야.”

“저런, 그래서?”

“곰팡이가 피었다고 아버지한테 말하니까 글쎄...”

“...?”

“잘했어, 곰팡이가 필지언정 아껴야 해.”


라며 아버지가 오히려 흐뭇해하더라고 했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월급이 무려 다섯 배나 되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을 때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부자가 될 것처럼 꿈에 부풀었다고 했다.

다섯 배나 되는 월급을 꼭 여섯 번 받은 후 아버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는 아끼고 절약하며 졸라매는 생활을 평생 해야했다.

그 습관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온 몸으로 스며들어 나는 목적도 이유도 없이 엄마의 절약을 이어가고 있었다.




신혼 때는 시댁에서 십 분 거리에 살았다.

어머니와 백화점 쇼핑을 간 적이 있었다.

냄비 하나도 백화점으로 사러 가는 시어머니와 쇼핑 잘 모르는 며느리의 동행이었다.

어머니의 쇼핑예정목록은 모르겠고 나는 K의 와이셔츠를 살 생각이었다.

마침 행사 매대에 흰 셔츠를 네 개 만 원에 팔고 있었다.

나는 이게 웬떡이냐 싶어 냉큼 다가가서 사이즈를 골랐다.

그런데 어머니가 훽 낚아 채시더니 제자리에 놓고는


“이런 건 못 써. 하나를 사도 제대로 된 걸 사야지.”


라며 휑하니 앞서 가신다.

목 싸이즈에 팔길이까지 골라놓은 셔츠를 다른 사람이 챙겨 넣는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 뒤를 따라갔다.

어머니는 행사매대가 아닌 정식 브랜드매장으로 갔고 그 곳에 멋스럽게 진열해 놓은 뽀얀 셔츠를 가리키며


“이거 좋네.”


하셨다.

조명발인지 원단이 다른 건지 어쨌든 화사하고 고급스러워보이긴 했다.

안 쪽으로 숨겨 둔 가격표를 기어이 찾아내 들여다 보니 이만오천 원이 붙어있었다.

좀 전에 본 셔츠 열 벌 가격이었다.

매일 셔츠를 출근복처럼 입어야 하는 상황이니 한 해 여름 입을 셔츠 여러장이 백번 나을 것 같았지만 어머니를 거역하고 그 매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만오천 원짜리 셔츠를 샀는지 아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명절에 녹두전을 부치면서 했던 사촌 형님의 말이 새삼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 바구니 만원짜리 사과를 사는데 작은엄마는 한 개 만원짜리 좋은 놈으로 사지.”




작년 장마 때 일본어 수업에 가던 날 하필 그 시간에 비가 엄청 쏟아졌다.

우산은 썼지만 신발은 속수무책으로 흠뻑 젖었다.

화장실에 가서 양말을 벗어 짜니 물이 주르륵 나왔다.

화장지를 떼서 신발 안에 넣고 교실로 돌아왔다.

수업하는 동안 어찌어찌 마른다고 해도 다시 집에 갈 생각을 하니 도무지 찜찜해서 강사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노란색 우비와 장화를 신고 일부러 물웅덩이를 밝아 첨벙거리는 꼬맹이 모습은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만화그림이 그려진 가방과 신발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세트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가방이었으면 좋았을 걸 엄마는 그 가게에서 무조건 제일 싼 걸로 샀다.

란도셀이라던가? 하는 등에 메는 가방과 반듯하게 각이 있는 것이 아닌 백년이 지나도 결코 찢어질 것 같지 않은 질긴 천으로 만든 신주머니를 사 주었다.

끈을 잡아당겨 들고 다니던 신주머니는 자꾸 다리에 돌돌 감겼다.

우비와 장화를 가져본 적은 당연히 없었다.

올해는 거금(?)을 주고 장화를 샀다.

사실상 장마 한 철만 지나면 되고 신발장도 좁고 비가 종일 내리는 게 아니면 신고 있는동안 답답하기도 할 테고 등등 장화를 사야 하는 이유보다 안 사도 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아침부터 비가 오던 날, 장화를 신고 수업에 갔다.

다행(?)히 수업이 끝난 후에도 비가 멎지 않았다.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왔다.

저녁을 먹으면서 장화가 좋더냐고 K가 물었다.


“어머나 세상에, 비가오는데도 양말이 뽀송하지 뭐야?


그 바람에 K에게도 장화 하나 사줬다.








작가의 이전글 나 오늘 집 하나 살 뻔 했잖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