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영어 수업시간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했다.
두유라이크 ‘무엇’ 이라고 물어야 하지만 보통은 너는 ‘무엇’ 사람이니? 라고 묻는다고 했다.
즉, 개를 좋아하냐 고양이를 좋아하냐고 물을 때
아임어 독 펄슨 혹은 캣 펄슨이라거나
커피파냐 차파냐를 말할 때에는 커피펄슨이거나 티펄슨이라고 말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강사는, 내가 보기에 너는 아마도 사람들 만나는 것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은, 너는 피플펄슨은 아니고 여행펄슨인 것 같다, 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당연하다는 말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어쩐지 즉답이 나오지 않았다.
피플펄슨이 아닌 건 맞는데 요즘들어 내가 진정 여행펄슨이냐, 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K의 휴가를 모아모아 앞 뒤 주말을 꽉 채워 7박 9일, 만날 노래만 부르던 영국여행을 했다.
비싼 항공요금으로 사실상 9일도 짧은데 와중에 유럽 언제 또 오겠냐며 반고흐 미술관에는 가봐야겠다고 이틀은 암스테르담까지 들르기로 했다.
마침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반고흐 특별전을 한다고 했다.
오로지 고흐를 보겠다고 암스테르담에 가려던 건데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들이 런던에 모인다니 그거 참.
예전처럼(코로나 이전이라고 해야하나?) 설레거나 들뜨거나 하는 마음보다는
어쩐지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음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떠나기 일주일 전 K2집에 캐리어 빌리러 갔을 때 사위가
“어머니는 벌써 짐 다 싸놓으셨을 텐데요 뭐.”
하는데 꽤나 머쓱했다.
“그, 그러게.. 이제부터 싸야지.”
빌린 캐리어는 K를 위한 것이었는데 그 후로도 며칠은 또 무슨 배짱인지 짐도 안 싸고 빈둥거렸다.
런던의 첫 느낌은 근거없는 익숙함과 낯섦의 연속이었다.
낯섦은 그렇다치고 익숙한 느낌은 의외였다.
항공권과 숙소를 여행사에 맡겼었는데 국적기 항공권 금액도 적절했고 호텔은 깔끔했다.
일정동안 묵는 모든 호텔에 조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에 K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보였다.
밥이나 국물요리가 없다는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뷔페식당 메뉴는 좋았다.
흡족한 식사를 하고 그 날은 내셔널갤러리에 빈센트 반고흐전을 보러 갔다.
예약이 꽉차서 포기하고 갤러리의 다른 전시만 봐야하나 어쩌나 걱정하던 끝에
영어반 멤버가 일요일 취소표가 나온 모양이라고 알려줘 기쁜 마음으로 예약에 성공을 한 터였다.
떠나기 전날 런던 현지 사진을 보내주며 요즘 런던 날씨라며 옷 챙기는데 참고하라고 했다.
햇수로 삼 년이나 같이 공부를 하면서도 아직 실제 만난적은 없는, 그러니까 온라인 친구에게서 이렇듯 기분좋은 배려를 받게 될 줄 몰랐다.
사진 속 날씨는 꽤 화창해보였다.
말 끝에 그는
-이 날씨가 그대로 여행기간내내 샘에게 머물기 바랄게요.
라고도 했다.
그래도 전생에 착한 일을 조금은 했는지 아니면 친구의 예쁜 바람 덕분인지 이틀 정도는 사진속 그 날씨와 비슷했다.
착한 일을, 하다가 말았는지 나머지 날은,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안 오는 것도 아닌
말로만 듣던 안개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졌다.
비옷도 우산도 필요없다는 말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곳까지 전철을 타고 오는데 까지는 순조로웠다.
필요한 예약하고 항공권 입장권 열차표 등 바우처 인쇄하고 여행사보다 더 촘촘하고 유용하게 짠 일정표 엑셀에 정리해서 각 한 부씩 프린트 해서 파일 홀더에 단디 모셔두고 이심칩 등록까지 마쳤다.
그런데 파워 J형 인간이 둘이나 있음 뭐하나 로밍한 K폰 배터리가 10, 9, 8, 7 하더니 전철타자마자 장렬히 전사한 것을.
열어두었던 내 폰의 구간 지도를 보며 겨우 환승역에서 갈아타고 목적지역에 무사히 내리기는 했으나 그것 또한 리셋이 되어버렸다.
호텔까지... 걸어 가야 하는데...
날은 어두워졌고 길에는 사람도 없다.
낯선 세상 한 가운데 버려진 기분이었다.
나보다 K가 더 당황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나는 걱정이 되지 않는다. (뭐지? 이 느긋한 기분은?)
길을 두 번 건너는 곳에 펍처럼 보이는 간판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일단 그 곳으로 가서 충전을 부탁하고 런던에 가면 먹어야 한다는,(혹은 그 것밖에 먹을 게 없다는) 피시앤칩스로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다. 물론 맥주도 곁들여야겠지.
나는 슬슬 기분이 들뜨기 시작하는데 K의 표정은 밤이라서인가 점점 새까매지는 것 같았다.
펍 안은 무척 유쾌한 분위기였다.
좁디 좁은 테이블 사이를 터 준 가족 손님 중 아빠인 듯한 사람덕분에 커다란 캐리어 옆에 두고 끼어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