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서치 힐데 Nov 10. 2023

영어가 삶에 스며든 순간

중등 학창 시절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영어였다. 책을 좋아한 문학소녀답게 국어도 좋아했지만, 익숙한 한국어는 영어라는 낯선 언어가 주는 매력을 뛰어넘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잠깐 배운 독일어에도 흥미를 느꼈지만, 인연 맺은 기간이 짧아 영어만큼 뜨거운 애정공세를 퍼붓지는 못했다.


직장인이 되어 영어를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시기는 10년 전, 박사유학을 준비하던 즈음이었다. 원하는 대학원에 입학 승인을 받기 위해 필요한 점수인 iBT 100점을 확보하기 위해 하루를 이틀처럼 살았다. 매일 출근 전, 스피킹 버디와 카페에서 만나 1시간씩 공부를 했다. 점심은 김밥으로 때우면서 유학을 준비 중인 만삭 동료와 스터디를 했다. 퇴근 후에도 집 대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서관으로 가서 토플 문제집을 풀었다.


작년 이맘때 40일 동안 영어공부를 부지런히 했더랬다. 국제무대에서 커리어를 꾸려보겠노라고 다짐하고 나니 토익성적표가 필요했다. 원하는 성적은 950점이었고, 이 점수를 받기 위해 총 3차례에 걸쳐 시험을 봤고 결국 955점으로 졸업했다. 당시 기쁜 마음을 블로그에 살짝 남겼었다.

https://blog.naver.com/justina75/222943520942


올여름, 계획했던 뉴욕행이 무산되고 한동안 목표 없이 방황했던 건 사실이다. 영어공부를 지속해야 할 유인도 찾지 못했고, 부지런히 참여하던 온갖 스터디도 토요일 2개만 남기고 모두 하차했다. 도전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는 삶은 참 편안했다. 퇴근 후에는 생각 없이 넷플릭스나 웹툰을 보면서 빈둥거리곤 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나날이 계속 이어지자 스멀스멀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추석 직전, 친했던 옛 동료와 점심을 함께 했다. 그 친구는 국제기구에서 근무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영어 스피킹과 라이팅 시험을 치른 직후라고 했다. 시험공부는 쉽지 않았지만 의미 있고 즐거운 도전이었다는 술회를 듣다 보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10년 전, 그리고 1년 전, 원하는 점수를 향해 열정적으로 매진하던 목표지향적 삶에 대한 동경이 흘러넘쳤다.


마침 이런저런 기회로 국제기구에서 근무해 본 경험이 있는 동료들과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역시 글로벌 기구가 내 성향에 잘 맞을 것 같다는 왠지 모를 자신감과 자만심이 샘솟았다. 이번에 실패했다고 섣불리 포기해 버리고 재도전하지 않으면 퇴직 후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 쉽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그나마 지금 이 순간이 내 여생 중 가장 젊은 순간이니 도전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국제기구 인터뷰를 보기 위한 자격을 갖추기 위한 최저조건은 토익 스피킹과 라이팅 점수 각각 160점 이상이었다. 200점 만점 기준이니 스피킹은 Advanced Low 이상, 라이팅은 Advanced Mid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텝스 기준도 있었지만, 내가 사는 지역 서점에는 텝스 스피킹과 라이팅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토익 시험을 치르기로 하고 일단 서점에서 눈에 띈 스피킹 책부터 두 권을 구입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시작한 수험용 공부에 맞는 삶의 패턴을 꾸리는 건 쉽지 않았다. 공부를 미룰 이유는 매일 수십 개가 떠올랐고,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시험에 지금 꼭 응시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건 어려웠다. 이렇게 계속 꾸물거리다가 어렵사리 결심한 공부의욕이 사라질까 싶어 일단 시험 접수부터 했다. 10년 넘게 새벽 운동과 매일밤 108배를 실천하는 영어스터디 동갑내기 버디와 오프라인 티타임 후, 제대로 자극을 받고 일주일 후인 10월 28일을 D-day로 잡았다.


출장도 있고, 늦은 밤까지 대기해야 하는 등 회사업무도 타이트한 편이라 스피킹 공부에 전념하기는 쉽지 않았다. 160점 이상을 받으려면 말할 때 문법실수도 거의 없어야 하지만, 쉬지 않고 유창하게 대답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온라인 강좌도 하나 수강했다. 시험 당일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시험장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집에서 4시간 동안 쉼 없이 스피킹 연습을 하고, 시험장 인근 카페에서 두 시간 동안 모의고사로 실전연습을 했다.


시험장소에는 개별 칸막이가 있었고, 시험 전에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성량을 테스트해 볼 수 있었다. 현장감을 살려서 말하는 게 중요하다는 꿀팁을 읽었던 게 기억나서, 배우라도 된 것처럼 잔뜩 오버해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이어갔다. 하지만, 결국 마의 7번 문항에서 3초 동안 생각하고 30초 동안 답변하면서 약간 공백을 갖게 되어, 마지막 문제까지 비교적 잘 풀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 찝찝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실수를 했기에, 원하는 성적을 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어 다음 스피킹 시험을 접수했는데, 5일 후 발표된 점수는  Advanced Mid에 해당하는 180점이었다.

스피킹 관문을 통과하고 쉴 새 없이 바로 라이팅 공부를 시작했다. 당장 일주일 후에 시험 접수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회사 내 친한 동료분이 생일선물로 안겨준 라이팅 책 두 권으로 7일 벼락치기를 시작했다. 회사 업무로드가 더 과중해져서 공부할 짬을 내는 게 어려워 점심시간을 알차게 활용했다. 점심약속 대신에 빈 회의실에서 홀로 열공을 했다. 타자를 빨리 치는 것도 중요해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출문제를 노트북으로 직접 풀어보고 정답과 비교해 보면서 핵심구문을 암기했다.


업무부담을 가슴에 품은 채, 수험생 모드로 살다 보니 스트레스 게이지가 슬슬 임계점에 다다르는 게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웃으며 지나쳤을 실수도, 정색하며 대응하게 되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매사에 지나치게 진지해졌다. 억지웃음을 살짝 지어보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쉽사리 앵그리 버드 모드로 전환되어버리곤 했다. 스피킹 성적을 확인하고 나니 이틀 앞으로 다가온 라이팅 시험은 무조건 180점 이상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승부욕이 몽글몽글 피어오른 상태로 공부에 매진하다가도 '원하는 점수를 받지 못했을 때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쓸데없는 걱정과 기우가 집중력을 저하시켰다.


시험은 비교적 잘 치렀다. 생각보다 꽤나 긴장해서 이메일 파트에서 100% 만족스러운 답을 담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300자 이상만 쓰는 되는 마지막 문제는 400자 이상 쓸 수 있었고, 쓰면서도 아이디어가 샘솟아 마지막 문장을 끝맺으면서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하지만 기쁨은 상대적인 듯. 회사에서 외국어 꽤나 한다는 몇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라이팅 점수가 180~190점대였다. 결국 '190점을 받으면 선방한 거고, 180점 이하를 받으면 우울해지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살짝 초조해질 즈음, 다행히도 원했던 Advanced High 점수인 190점을 받고 YBM 그랜드 슬래머 EXPERT 인증서도 받았다. Expert 위 단계는 Master로 TOEIC 만점, 스피킹과 라이팅 모두 Advanced High이면 받을 수 있지만, 나는 Expert 인증서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어제 읽었던 <행복한 출근길>에서 법륜 스님은 "여러분이 자꾸 '인생의 목표, 목표' 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운 겁니다. 인생에 의미를 너무 많이 부여하기 때문에 인생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괴로운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역시나 목표가 있는 삶이 좋다.


삶에 있어 목표란 내 삶의 근간이자 불필요한 외부 잡음에 쉽사리 내 자신을 내어주지 않도록 생의 중심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기둥이다. 내가 감히 이룰 수 없는 터무니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허황된 목표를 꿈꾸기만 한다면 내 인생이 버겁고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내게 있어 목표란, 한 번 밖에 없는 삶을 대충 살지 않도록 나를 일깨우는 경종이다. 나를 매 순간 깨어있도록 격려하면서 충만한 삶으로 이끄는 파로스다. 영어 S&W 도장 깨기 목표를 이룬 지금, 이제 나는 다음 목표를 향해 힘차게 비상 중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