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의 질문에 대한 다소 긴 대답
재미로 하는 공부
어젯밤 괴테의 자서전인 <시와 진실>을 읽고 있었다. 이 책은 850페이지 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고 있다. 진짜 딱 벽돌처럼 생겼다. 이런 책에 매료되어 줄을 치며 꼼꼼히 읽다 보니 큰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걸 나중에 알았다. 밤늦게 공부를 하다가 거실 소파에 앉은 아이가 내가 뭔가 두꺼운 책을 읽는 게 신기했나 보다. 그리고 내게 이런 호기심 어린 말을 건넸다.
“아빠는 공부가 재미있어요? 맨날 그런 두꺼운 책을 읽고 계신 게 너무 신기해요. 저는 공부 재미없는데... 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세요?”
말을 걸어준 아이에게 너무 고마웠다. 나는 녀석의 호기심을 잔뜩 고양시켜 주고파 이렇게 말했다.
“재미로 하는 거야. 아빠는 이 책 너무 재미있어. 그냥 그래서 읽는 거다. 하하”
이 말에 아이는 항변하듯 이렇게 말한다.
“그런 두꺼운 책이 재미있을 리 없잖아요. 딱 봐도 지루할 것 같고 졸려요. 저는 그다지~”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러게 이렇게 두꺼운데 아빠는 이 책이 너무 재미있네. 나중에 너도 한번 읽어봐. 재미있는지 없는지. 만약에 재미없으면 그때는 잠잘 때 베고 자면 되지 뭐. ”
어제 아이는 고등학교 입학 후 첫 모의고사를 치고 성적을 받아왔다. 탁월하게 잘하는 과목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과목도 있었다. 과목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경험한 것이다. 아들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나는 내 고교 시절이 생각났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3월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아 든 나는 완전 멘털이 붕괴되었다. 입학 성적이 나쁘지 않았는데 반해서 첫 모의고사 성적 수준은 내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전국에서 선발된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이었다. 그중 서울 강남이나 경기,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 온 친구들은 이미 주요 과목에 대한 선행학습이 끝난 상태라는 걸 그때 알았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나는 학원 근처도 못 가봤는데 다수의 친구들은 이미 고교 과정을 다 끝낸 상태였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 당시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면 중앙 현관 벽에 1~50등까지 석차 대로 이름을 게시했었다. 50등이면 상위 25%였는데 벽보는 인서울의 상위권 대학 진학이 가능한 바로미터로 여겨졌다. 3월 모의고사를 기점으로 내 목표는 벽보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되었다. 그 후 1학년 1학기는 새벽 3~4시까지 공부에 열을 올렸다. 그 당시 나는 공부 잘하는 것만이 유일한 보상이었다. 조실부모한 내 자존감의 원천은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타이틀뿐이었다. 너무 간절했다.
하지만 성적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그 당시는 학력고사에서 수학능력시험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였다. 수학능력 시험은 아직 테스트 단계라 모의고사 때마다 유형이 변했다. 지금과는 다르게 선생님들도 수능에 대한 파악이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었다. 수능을 어떻게 대비해야 한다는 지에 대한 아무런 전략도 교재도 없던 시절이었다. 맨 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열심히 했으나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1학년 3월 모의고사의 성적은 2학년 말이 될 때까지 요지부동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국어(언어영역) 점수는 좋았다. 내신도 국어는 늘 최상위권이었다. 국어, 문학, 작문 선생님들이 너무 훌륭했다. 나는 학부 전공을 내가 좋아하던 국어 선생님의 권유로 선택하기도 했다. 그 만큼 국어는 나에게 희망의 등불과도 같았다.
그러나 영어, 수학에는 잼병이었다. 문과생이었으니 수학은 그렇다 치고 영어는 성적이 향상될 기미가 안보였다. 수능도 문제였지만 내신은 정말 최악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보는 영어 시험에는 작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작품의 배점이 30%를 차지했다. 객관식 시험이 모두 맞는다 해도 작문을 못하면 좋을 성적을 받을 수 없었다. 한글 작문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내가 영어 작문을 잘했을 리 없다. 어떤 날은 한 줄도 못쓰고 제출한 적도 있다. 나는 3년 내내 제대로 된 영어 공부를 못하고 학교를 졸업했다.
3학년 마지막 겨울 방학 때의 일이다. 졸업을 앞둔 그때 학교에 처음으로 원어민 선생님 2분이 부임하셨다. 그 중 미국 South Dakota 에서 오신 Amy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미국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 후배들이 Amy 선생님과 유창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영어 회화를 잘할 리 없는 나는 더듬더듬 한 두 마디 단어를 내뱉는 수준 밖에 안 됐다. 그러다 이런 시골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를 묻고 싶어 이렇게 말했다.
“How do you come here?”
Amy 선생님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By airplane, By bus? But What do you talking about……”
그 후로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며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너무 부끄러웠다. How 라니, 비행기, 버스라니… 후배들 앞에서 말 같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이 너무 쪽 팔렸다. 쥐구멍에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일까? 대학에 진학하고 제일 먼저 토플 새벽반 수강 신청을 했다. 당시 학교 어학연구서에서 운영하는 어학당은 매우 저렴한 비용에 괜찮은 강좌들이 많았다. 나는 대학 1학년 때부터 두꺼운 토플 책들을 들고 다니며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계속 공부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고 싶기도 했지만, 내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이유는 Amy 선생님과 나눴던 How의 쪽 팔린 기억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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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도서관에 가서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책들을 찾아봤다. 40~50권 정도는 봤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회화를 잘하려면 영화를 통째로 암기하거나 회화 테이프를 반복 청취하고 받아 적는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토플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토플 리스닝 테이프 하나를 골라 앞 뒷면을 반복해서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냥 노래라 생각하고 들었다. 도서관 책상에 앉아서 듣다가 졸리면 캠퍼스를 걸으며 듣고 또 들었다.
신기하게도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잘 안 들리던 문장과 단어들이 어느새 익숙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그 문장들을 노트에 받아 적기 시작했다. 스크립트를 보지 않고 틀리면 틀리는 대로 그대로 받아 적었다. 몇 주 만에 테이프 앞 뒷면을 필사한 노트 한 권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필사 노트를 들고 마치 성우가 된 것처럼 문장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는 할 수 없으니 도서관 앞 탑과 달이 비치는 연못(영탑지)에서 큰 소리로 암기했다. 지금도 시작 전반부는 줄줄 외울 수 있다.
1년 정도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잘 버티고 난 다음 4학년 1학기가 되었을 때 모교로 교생실습을 나갔다. 그때 또다시 Amy 선생님과 만나게 되었다. 나는 대학 3년 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공부했다. 이제는 동료로 만난 선생님과 속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다.
그때부터 Amy를 누나로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Amy 누나가 한국에 체류한 7~8년 동안 수시로 전화하고 만나고 편지를 쓰면서 내 영어 실력은 더 좋아졌다. 그때 한 영어 덕분에 오랜동안 MD 생활을 하고 무역업이 종사할 수 있었다. 영어 무지렁이였던 나는 영어라면 할 말이 너무 많은 영어 마니아가 된 것이다.
나는 어제 아이에게 이런 말도 했다.
“네가 지루하고 힘든 이유는 그만큼 잘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어떤 분야든 처음 그 힘든 시간을 잘 견디고 공부해 나가면 점점 알아가게 되고 그다음은 소소한 재미들을 느끼게 되더라. 아빠한테는 책 읽는 게 그래. 한 권 한 권 읽다 보니 수 백 권을 읽게 되었고, 이제를 이전에 읽었던 책들과 연결되는 수 천 권의 책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 책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게 너무 재미있더라. 아무튼, 아빠는 재미로 공부하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잖아? 너도 중간고사 치르고 나면 아빠랑 책 한 권 같이 읽자. 어때?”
아이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내가 읽고 있던 책의 내용은 이러했다.
일찍부터 내게 당신이 애착을 가지고 있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아버지와 같은 법학을 공부하고 그다음에 다른 대학으로 옮겨 학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는 나에게 베츨러, 레겐스부르크와 빈에 가서 거기서 다시 이탈리아로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파리를 먼저 보아야지, 이탈리아를 보고 나서 파리를 보면 시시하다고 몇 번이고 거듭 말하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이런 꿈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될 때마다 나는 기뻐하며 열심히 들었다. 특히 이야기가 이탈리아에 관한 내용으로 변하여 마지막에 가서는 나폴리에 대한 설명으로 끝날 때는 매우 즐거워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평소 근엄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얼굴에도 생기가 도는 것 같았고,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이런 낙원으로 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생겨났다.
개인 교수 시간은 점점 늘었고 나는 이웃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는데, 이 합동 수업은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업 방식은 구태의연했으며, 아이들의 무례한 태도와 때때로 저지르는 질 나쁜 장난들이 가뜩이나 시시한 수업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수업을 재미있고 변화무쌍하게 만드는 명문집은 아직 우리의 수업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소년들에게는 무미건조한 코르넬리우스 네포스(BC 1세기 로마의 역사가)는 너무 평이한 데다 설교와 종교 교육으로 인해 진부해져 버린 신약성서, 첼라리우스와 파조르(헤르브론의 신학교수)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당시의 독일 시인들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생긴 운문과 시구에 대한 일종의 열광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사실 그보다 앞서 과제를 수사학적으로 다루다가 시가적으로 다루게 되면서부터, 이를 흥미롭다고 느꼈던 그 순간부터 나는 이런 열광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나와 친구들은 일요일마다 모임을 가졌고, 그 모임에서 자신이 직접 쓴 시를 발표하기로 했다.
<시외 진실, 괴테(최은히 역), 동서문화사>
나는 사실 아이들이 입시 공부에 치여 힘들어하고 좌절하는 것을 보는 것이 괴롭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묵묵히 나만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밖에 없다.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여러 채널에서 말 하는 것을 아이들은 잘 알고 있다.
같이 책을 읽어 보려고 많은 시도를 해 봤으나 쉅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바쁘다. 책 읽는 시간 그런 한가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학교, 학원을 오가며 온갖 시험들을 준비하느라 새벽까지 진땀을 빼고 있는 아이를 보노라면 너무 측은하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나의 읽고 쓰는 모습이 아이에게 작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큰 열매를 맺게 할 것을. 지난주 전영애 선생님을 뵈었을 때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이들은 뿌리와 날개를 달아줘야 해요. 먼저는 역경을 견디는 노동의 가치를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교육 밖에 희망이 없는데, 우리 교육이 가장 엉망인 상황이라 교육을 , 정말 좋은 의미로 교육에 대해서 고민하시는 분들이 너무 귀중합니다. 제가 오죽하면 뿌리와 날개 부분에 그렇게 잔소리까지 하겠어요. 너무 정말 교육이 얘들을 왜 그렇게 닦달을 해 갖고 애들 유치원부터 그렇게 배우느라고 고생하는 영어요. 맘먹고 공부하면 한 1년이면 할 수 있어요. 왜 애들을 그렇게 닦달을 해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 싹 없애버리고 책을 못 읽게 만들어요.”
나는 선생님의 이 말씀에 감격했다. 대안적 교육에 너무나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을 듣고 희망이 생겼다. 이 시대의 큰 등불이 우리 아이들과 청년들을 향하고 있다. 너무나 값지고 숭고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바른걸음으로 큰길을 가는 이들에게 박수를 져주시겠다는 그 말이 너무 소중하다. 박수하는 참 크게 칠 자신이 있으시다고 했다. 당신의 글에서도 그런 박수 소리가 조금 배어 나오길 바란다고 하시지만, 박수가 아니라 무한한 지지가 온 땅에 내리는 듯하다.
나도 선생님처럼 세상의 많은 것들에 호기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경쟁하며 잘 살겠다는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함께 같이 살아가 보자고 서로를 돌아보는 그날까지, 그 희망의 날개를 달기 위해 나는 오늘도 피와 땀을 흘려 뿌리를 뻗어볼 작정이다.
오늘은 스승님을 뵙기로 한 날이다. 마음을 단정하게 준비하고 하시는 말씀 하나하나 마음에 아로새기고 돌아올 것이다. 여백학파(이건 그저 나의 소망이다. 여백학파가 있울리가 없다.)의 성실한 문하생이 되어 그분을 그림자처럼 따라 살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작은 희망의 등불이라도 비춰줄 수 있다면 내가 세상에 다녀간 의미 있는 발자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서원의 곳곳을 다니며 잡초를 뽑아내고 싶다. 많은 어린 나무들이 천지의 기운을 받아 하늘로 뻗어 나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