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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스트쪼 Nov 06. 2024

석봉이 온다

한석봉 엄마의 하루 10분 또박또박 예쁜 글씨 쓰기

“글씨는 마음의 필체다.”


달팽이 같은 거북이와 사는 우리 집은 매일매일 이 느림의 미학 때문에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건사고는?

두둥, 글쓰기가 당첨되셨습니다.

그냥 글쓰기 아니고, 괴발개발 글쓰기죠.

어떤 사람에게는 라면 끊이 듯 쉬운 이 또박또박 글쓰기가 우리 느린 거북이에게는 또 또 어렵다. 내 눈에만 외계어 같으면 다행이지. 학교 선생님이며 학원 선생님이며 다들 거북이 글씨를 보실 때마다 응? 이마에 의문의 지렁이 세 마리가 꿈틀거린다.  

마음의 필체가 너무나도 아름답다

이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자면 우선 거북이 이것이 주제를 모르고 왼손잡이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왼손잡이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어떠한가


“왼손잡이는 창의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왼손잡이의 사고방식은 종종 다른 이들보다 빠르고 날카롭다.”


창의성? 빠르고? 날카로워? 응? 뉘 집 말씀? 아. 알았다. 우리 집 거북이는 참으로 느린데 그 재빠르고 날카롭다는 왼손잡이로 태어났으니 본투비 창의적이로구나. 그런데. 발은? 발은 왜 오른발잡이지? 왼손은 왼발. 오른손은 오른발이 정석 아닌가? 너 대체 정체가 뭐니? 외계에서 왔어? 진짜 태생부터 창의적일 계획이었던 거야?


왼손잡이 때문인지, 소근육 발달이 느려서인지, 소근육 발달이 늦어서 왼손잡이인지 인과를 알 순 없지만 어쨌든 우리 집 외계인 거북이는 악필이다. 한석봉이 벌떡 일어나 날아 차기를 해버릴 만큼.




 헌데 이번에 이 왼손잡이를 오른손잡이로 바꿔치기할 웃픈 사건이 발생했다.

멀쩡히 잘 올라가던 학교 계단에서 혼자 중심을 잃고 발라당 넘어져 왼쪽 새끼손가락에 실금이 가게 된 것이다. 어떻게 우리 아들에게만 눈 안 보이는 귀신이 달라붙었나. 매번. 이렇게. 너만. 혼자서. 잘 넘어지지?

"아들, 다친 친손가락 많이 아파?"

"아뇨, 전혀"

무디다 무디다 하니 고통에도 무디구나. 참으로 너답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앗싸. 잘 되었다. 독하게 긍정적인 엄마는 이번 기회에 아들을 왼손잡이에서 오른손잡이로 둔갑시키기로 결심했다. 아이의 자율성을 해친다는 말도 있고, 왼손잡이가 뭐 어떠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건 한석봉들의 얘기일 뿐. 오른발잡이에 엉망진창 왼손잡이라 마치 정체불명의 외계인 같으니, 그런 말씀은 사양할게요.

 각고의 설득 끝에 아들은 오케이를 날렸고, 눈물의 '하루 10분 또박또박 예쁜 글씨' 쓰기가 시행되었다.

하루 10분 또박또박 예쁜 글씨 - 유성령 지음


4학년이지만 거북이답게. 교재는 초등저학년용. 너에게 안성맞춤이다. 자쓱아.


그리고 나에게도 딱이다. 이 아줌마야.


  고백하자면 아들이 악필인 이유를 여러 가지 핑계로 둘러댔지만, 사실 나야말로 한석봉이 뺨 때릴 정도로 글씨계의 난봉꾼이다. 손글씨로 연애편지를 쓸 바에야 차라리 연애 안 한다 했고, 친오빠가 군대에서 선임들에게 보여줄 위문편지를 부탁했을 때도 "이게 여자 글씨일 리가 없다"라며 선임들에게 괴롭힘 당할까 친구에게 대필을 부탁했었다.

모전자전. 엄마가 이 정도이니 아들은 말해 뭐 해.

그래서 난 안다. 글씨를 못쓰면 얼마나 불편한 일들이 많은지.

“글씨가 곧 그 사람이다.”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따끔따끔한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이라. 그럼 난 너무 빨리 바닥인 정체를 들키는 건데. 이건 반칙이야.

그래서 더 아들의 글씨체를 바꾸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외계에서 온 거북이 정체를 너무 빨리 들키지 말라고.     


똑같은 글씨 교정 책 두 권을 샀다.

하나는 거북이 것. 하나는 나무늘보 것.

혼자 두지 않으마. 우리 같이 가보자.

 

명필이냐 악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우리 정체를 잘 숨겨보자. 거북아.  

하루 10분 또박또박 예쁜 글씨 - 유성영 지음

P.S 또박또박 예쁜 글씨쓰기 결과는 두 달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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