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즐기라는 말을 요즘들어 많이 접한다. 내가 생각하는 고독은 사람들의 무시, 멸시, 반감, 분노, 혐오와 같은 것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고독은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에서 유유자적 하는 것이 아니다. 온갖 부정적인 반응들로부터 자아를 지켜내는 것이 고독한 자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그러한 과정을 즐기라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할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고독을 즐기는 방법을 차차 알아가고 있다.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서야 사유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고독을 즐기는 것이다.
고독을 즐길 줄 알게 되어서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사유의 자유가 그 첫번째다. 두번째는 자아의 진정한 발현이다. 타인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오고서야 자아는 세상에 진정한 자기 자신을 표출할 수 있게 된다. 좋은 평판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의 작품은 자아의 표출로서 탄생한 작품에 비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최근에는 평판을 돈으로 환산하는 데에만 급급한 이들이 스스로를 예술가라 칭하지만, 사실 예술은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자아와 세계의 충돌이 발산하는 빛이다. 좋은 곡을 통해 좋은 평판을 얻을 수는 있지만, 좋은 평판을 위해 좋은 곡을 만들 수는 없다.
고독을 즐길 줄 알게 되어서 얻은 세 번째 선물은, 스스로를 재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회의 요구에 맞춰 행동하기를 멈출 수 있다. 대신 나에게 내재된 진중하게 움직이는 엄격한 재판관의 시선으로 나의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한 규범이고 법을 초월한 올바름이다. 사람에게 내재된 재판관의 잣대는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이러한 스스로의 도덕관을 자신의 삶에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고독을 즐길 줄 알게되면 잃게 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사회와의 연대감이다. 더이상 사회는 사회로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이루는 수많은 원자 단위의 개인들로 보여진다.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적의나 욕망을 품고 있으며, 사회라 불리던 것은 사실 신 보다도 더 실체가 모호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회와의 연대감은 아이가 어머니의 모성에 기대듯이 개인들에게 안정감을 주는데, 사실 그녀가 어머니가 아닌 허상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고독을 즐길 줄 알게 된 자는 더이상 사회와의 연대감과 이에 따르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잃게 되는 것이 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과 감정의 획일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감정의 획일성이란 본디 개인이 고독을 잊고자 타인이 지시한 바에 따라 감정을 느끼는 것인데, 고독을 즐길 줄 알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요구였는지 깨닫게 된다. 한 번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더이상 타인이 지시한 바에 따라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 원초적인 단계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역사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감정을 느끼고 있으므로,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는 그들로부터 소외받는다.
이외에도 고독을 즐길 줄 알게 되면 잃는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을 즐길 줄 아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데, 고독을 즐길 줄 알게 되므로써 잃는 것들은 주로 착취를 위한 타인의 모략이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지만, 얻게 되는 것들은 보다 원초적이고 인간적이며 도덕적이고 자유로운 것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