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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om P Nov 08. 2024

운명론자의 반항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전능한가. 그가 전능하다면 그는 선한가. 신이 존재한다면 전능하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선함을 규정하는 힘. 그것보다 강한 힘이 있던가. 그렇게 선악은 구분되고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의 동물들에게 주입된다. 그렇게 동물은 사람이 된다. 사람은 전능한 힘 앞에 삶을 내어놓는다. 그리고 시지프스의 바위를 굴리는 데에 만족한다. 또는 만족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인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신이 없다면 세상은 더 비참한 곳이다. 비참한 동물들이 사육되고 육식의 쾌를 좇는 이들의 식탁에 오른다. 그 식탁에 고기를 운반하는 그들도 곧 고기가 될 신세다. 이 다음 접시에 올라갈 것이 자신의 살코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접시를 나른다. 식탁은 가장 맛이 덜 한 짐승이 담당한다. 그의 등 위에는 커다랗고 납작한 바위가 올려져 있다. 그것은 동료들의 고기를 써는 받침대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 가축 중 하나다. 우리 대부분은 가축이다. 한 명의 육식을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축의 생명이 필요한가. 하지만 나는 저항한다. 나는 부조리에 반항한다. 한 순간의 불장난도 허용되지 않는 나의 어린 시절을 비관한다. 더이상 나에게 운명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만일 의미가 있다면, 그저 나의 육신의 미래 따위에 관여할 뿐이다. 나는 반항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나에게 남은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운명이 내게 내맡긴 시간동안 의미를 찾아 헤매이는 것이다. 그 방황이 나에게 가장 큰 의미를 가진다. 그 외의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내가 아닌 운명의 손아귀에 달려있는 것에 집착해도 소용이 없다. 운명은 짖궂어서 쥐려 할 수록 앗아간다.


 더러운 육식의 우리에 갇힌 가축이라 할지라도, 나는 눈망울을 꿈뻑이며 의미를 찾는다. 어느 순간은 시간을 초월하기도 한다. 그것이 나의 정신이다. 나는 가끔 나의 시작과 끝과 그 사이에 놓인 짧은 공간을 마주한다. 그것은 그 자리에 늘 그대로 있다. 나의 모든 방황을 머금고 세상에 놓여있다. 그 자체로서 가치있다. 그 자체로서 빛이다. 그 자체로서 우주다.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을 포괄하고, 그 자체로서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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